유럽의 역사

소아시아 전역: 케말의 터키를 구원한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소아시아 전역: 케말의 터키를 구원한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1919년 그리스군은 열강 대표의 자격으로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 이즈미르)에 상륙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국가의 꽃이라 할 인적 자원을 막대하게 희생한 열강들은,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힘을 쏟을 생각이 없었고, 더더욱 아나톨리아 깊숙한 곳에서 케말주의 세력과 다시 싸울 의사는 더욱 없었다.

세브르 조약과 그리스의 선택

그리스에 귀속되기로 한 곳은 스미르나 지역뿐이었으며, 그마저도 세브르 조약 서명 5년 후 주민들의 국민투표를 거쳐 최종 결정되도록 되어 있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이를 계기로 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정치 현안으로 삼았는데, 결과적으로 자신의 성과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야당만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스 국왕 복귀'를 슬로건으로 내건 통합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국이 반전됐다. 다만 이러한 그리스의 국가적·정치적 변화가 당시 열강들의 태도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열강들의 잇따른 이탈

이탈리아는 베니젤로스의 실각을 기다릴 것도 없이 소아시아에서의 그리스군 주둔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프랑스는 킬리키아에서 명분상의 저항, 즉 무기를 대가로 치르는 저항 끝에 케말이 사실상 옛 질서를 회복하자 케말 진영에 합류했다. 프랑스는 소수의 잔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도 중무기는 터키 측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북서 소아시아를 초보적인 병력으로 장악하고 있던 영국 역시 철수했으며, 그 책임을 해당 지역에 제3군단을 배치한 그리스에게 떠넘겼다. 한편 소련은 케말리스트 군대에 중무기를 공급하는 최대 공급자였는데, 이는 베니젤로스의 제안으로 그리스가 1919년 우크라이나 원정에 개입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엄중 중립' 선언과 무기 차단

케말에 우호적인 프랑스의 태도와 근동(近東)에서 격화된 프랑스-영국 경쟁은 결국 1921년 4월, 동맹국들이 교전 당사자들에 대해 '엄중 중립'을 선언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리스의 소아시아 노력은 강력하고도 뜻밖의 타격을 입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협조를 얻어 그리스로 향하는 필수 군수물자 공급을 차단했다. 1920년 선거 이후에는 그리스가 여전히 교전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케말에게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상선을 검문할 권리마저 박탈했다.

프랑스는 '동맹국' 그리스가 콘스탄티노플을 해군 기지로 사용할 권리를 부인하는 데도 앞장섰다. 반(反)그리스 열정에서 프랑스를 뒤따른 것은 이탈리아였는데, 이 나라는 케말에게 각종 군수물자는 물론 비행기까지 공급했다!

각자의 계산: 열강들은 무엇을 원했나

미국은 1920년 11월 대통령 선거 이후 고립주의 노선으로 회귀했다. 영국은 그리스를 격려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승리 가능성에서 이득을 챙길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패배 시에는 과감히 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이 진정으로 신경 쓴 것은 '보호'를 위임받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을 터키의 어떠한 행위로부터도 지키는 일이었다. 프랑스 역시 중동에서 활동 무대를 영국에 내주길 원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러한 상호 견제의 틈을 교묘히 이용해 중동과 발칸에서 몫을 얻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북에피루스의 알바니아 양도를 사실상 관철시켜 그곳을 '보호'령으로 삼았고(그 오늘날까지), 베니젤로스-티토니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령 도데카네스 제도의 점거를 계속했다.

런던 회의와 프랑스-앙카라 협정

영국은 소아시아 문제의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고자 런던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프랑스 총리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케말 대표단과 협정을 체결해, 프랑스가 무스타파 케말의 혁명 정부 즉 앙카라 정부를 승인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이 협정은 프랑스와 앙카라 정부 간 적대 행위의 종결, 킬리키아 관련 사항의 처리와 프랑스군의 철수,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에 대한 터키 광산의 우선권 부여, 터키 철도 운영 참여, 바그다드 철도의 상당 구간에서 독일의 뒤를 잇겠다는 구상 등을 골자로 했다.

모스크바 조약: 소련의 전폭적 지원

1921년 3월 16일, 앙카라 정부는 소련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터키는 이를 통해 동북부 국경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소련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같은 날 무스타파 케말에 대한 무상 재정 지원 협정도 맺어졌다. 레닌은 케말에게 1천만 골드 루블을 각 500만 루블씩 두 차례에 걸쳐 제공했다. 터키 측은 또한 야포 327문, 소총 약 4만 자루, 포탄 15만 발, 각종 탄약, 그리고 수백 톤에 달하는 연료를 지원받았다.

외세는 구원하지 않는다

그리스가 소아시아에 개입한 이후 남은 선택지는 이오니아에서 철수하거나, 아니면 군이 직접 케말리스트 세력을 분쇄하는 작전을 펼치는 것뿐이었다. 후자가 선택되었지만, 이는 전자만큼이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한 채 좌우 측방이 문자 그대로 허공에 내노출된 상태에서 적대적인 배후지로 진격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최소한 극도로 위험한 행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동맹국'들이 트로이 목마처럼 가져다준 선물을 거두려던 교착 상태 속에서, 그리스에게는 다른 출구가 없었다. 마침내 닥친 검은 참화 속에서도 '동맹국'들은 케말주의 무장 세력에 의한 그리스 민간인 학살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았고, 스미르나 항에 정박한 자신들의 군함에 피신하려던 불행한 사람들이 살해되는 것조차 묵인했다.

바로 이곳이 분열로 이어진 길목이다. 물론 분열 자체는 외세가 강요한 것이지만, 그 수단으로 이용된 것은 '외국의 칼은 결코 그리스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모레아의 노장,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의 격언을 잊어버린 그리스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