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5월 17일, 독일 제국 전역에서 시행된 인구조사는 국가사회주의(나치) 정권이 모든 시민을 등록하고 유대인을 분류·분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글: 카리나 베르너(Karina Werner)
인구조사의 역사는 로마 제국과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성경 구절도 익숙할 것입니다. 인구조사는 언제나 국민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수단이었으며, 권력 정치의 도구로 기능해 왔습니다. 그러나 1939년 5월 17일에 시행된 인구조사는 특히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조사를 통해 나치 정권은 독일인 전체는 물론, 함부르크·브라운슈바이크·베를린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비아리안(비아리아인)'을 등록하고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통한 완전한 통제
1940년, 당시 독일 통계학회 회장이었던 프리드리히 잔(Friedrich Zahn)은 "통계는 본질적으로 국가사회주의 운동과 가깝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유착 관계를 고려하면, 나치가 처음부터 통계를 활용해 국민의 삶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1933년 6월 16일, 새 권력자들이 집권한 뒤 처음 실시한 인구조사에는 이미 수십만 명의 '유대교 신자'가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보고하도록 한 자녀 수 같은 데이터도 나치의 중요한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가치 있는' 여성의 출산 목표를 산출하는 데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NS 체제 아래 개인정보 수집 붐
제3제국에서는 개인 데이터 수집이 일종의 붐처럼 번졌습니다. 각급 당국과 관청은 국민 정보를 빈틈없이 수집했습니다. 함부르크의 주민등록 시스템은 그 모범 사례로 꼽혔습니다. 1935년 함부르크 내무당국은 독일 내무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외국인의 왕래가 많은 독일 최대의 무역·항구 도시 함부르크는 선원 등 유동 인구를 처리하면서도 기존의 검증된 등록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함부르크 통계청에는 360명의 직원이 근무했습니다. 청장은 헬무트 스쾰린(Helmut Sköllin) 박사였으며, 그는 1945년 이후 탈나치화 과정에서 해임되었고 직원 절반 이상이 그와 함께 물러났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통계청 채용은 더 이상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938년 브라운슈바이크 관청은 경험이 풍부한 두 명의 지원자를 거르고, 경력은 부족하지만 NSDAP(나치당) 당적이 오래된 인물을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홀러리스 계산기가 가속화한 데이터 처리
[사진] 1939년 인구조사에 사용된 홀러리스(Hollerith) 계산기.
통계 자료의 처리는 한층 현대적인 계산·분류 기계의 도입으로 속도를 냈습니다. 미국 IBM의 독일 자회사 '도이체 홀러리스 마쉬넨 게젤샤프트(Dehomag)'가 공급한 고성능 홀러리스 천공카드 계산기가 대량 데이터 처리에 동원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인구조사 준비
차기 인구조사는 원래 1938년 5월 17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으로 1년 연기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포괄적인 인구조사가 계획된 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만 16,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모집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조사표를 집계하고 데이터를 전송하는 '조사원' 역할을 맡았습니다.
볼펜뷔텔(Wolfenbüttel) 통계청장은 1938년 회의록에서 시장의 협조를 얻고자 열정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우리 국민을 위대하고 행복하게 만들려면 행정 조치에 필요한 통계가 반드시 제공되어야 합니다." 또한 "고의로 허위 진술을 하는 자는 국민의 복리를 위태롭게 하는 기만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사원 모집 광고는 물론,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한 홍보도 동원되었습니다. 라디오를 통한 대대적인 선전이 가동되었고, 마침내 조사 용지가 각 가정에 배포되었습니다.
'인종'을 묻다
일반 인구조사 양식은 결혼 여부, 직업 등 기본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러나 1933년과 달랐던 점은 '부모 및 학력에 관한 정보를 기재하는 보충 카드'가 함께 동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카드는 종교와 함께 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 근거해 '완전한 유대인', '1급 및 2급 유대인 혼혈'을 포괄하는 '인종' 항목도 문의했습니다. 답변은 자체 봉인 봉투에 넣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겉보기의 재량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솔직한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집계와 평가의 선구자, 함부르크
1939년 5월 17일의 인구조사는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사원들은 집집마다 다시 방문해 집계표를 수거했습니다. 반면 집계 작업은 고단했습니다. '혈통'을 판정하는 보충 카드 부분이야말로 나치당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유대인 혼혈'의 수를 세는 일이 가장 시급한 '즉각 프로그램'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함부르크 통계청은 특히 빠른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 불과 9월에 첫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르크 인구 1,711,877명 가운데 8,438명의 유대인이 등록된 것입니다. 이는 이미 심각하게 감소한 수치였습니다. 1933년 인구조사에서는 유대교 신자가 16,973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1933년에는 1,400명이 넘는 유대인이 거주했지만, 1939년에는 575명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대도시로 피신하거나 해외로 이주한 것입니다.
데이터의 발굴과 활용
역사학자 괴츠 알리(Götz Aly)와 카를 하인츠 로트(Karl Heinz Roth)의 연구에 따르면, 1939년 인구조사 자료는 주소·직업·혼혈 정도를 포함한 제국 전역의 모든 '비아리안' 인명카드, 이른바 '폭스툼스카르타이(Volkstumskartei)'를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괴츠 알리는 이 카드 목록을 "유대인 등록의 핵심"이라 규정하며, 추방이 바로 이 파일을 통해 조직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1939년 인구조사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는 불가능했을까요? 연구자들의 평가는 아직도 갈립니다. 유타 비토그(Jutta Wietog) 같은 역사학자는 경찰과 게슈타포가 '독일 유대인 제국협회'의 강제 조사 명부 등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파일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고 반박합니다.
인구조사 데이터는 제3제국에서 다른 목적으로도 동원되었습니다. 국방군(Wehrmacht)은 전쟁 중 '인력 배치'를 최적화하는 데 이 데이터를 활용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는 국방군 장병에게 주택을 배정하기 위한 '시민 숙소 등록부' 작성에도 조사 자료가 사용되었습니다. 함부르크 통계청은 1944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국방군 숙소 배정은 전반적으로 원활하고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통계청이 훌륭한 기초 자료, 즉 전쟁 직전 마지막 통계인 1939년 함부르크 인구조사를 온전히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시국가'에 맞선 저항: 1945년 이후의 인구조사
[사진] 자신의 모든 것을 밝혀야 하는 '유리 인간'. 1987년 인구조사 반대자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통계학자들조차 제3제국의 몰락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인구조사는 점령기 독일에서 1945년 소련 점령지역에서, 1946년에는 서부 3개 점령지역에서 각각 실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무엇보다 난민, 이주 정착민, 전사자 파악이 중요했습니다. 동서독에서 여러 차례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뒤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987년 5월 25일 서독 인구조사였습니다. 1,000개가 넘는 시민 발의 단체가 결성되어 보이콧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시민은 자신을 '유리 인간(투명한 시민)'이라 여겼고, 연방공화국이 '감시국가'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조사 당일에는 이름판을 잘못 달거나 설문지를 잘라내야 한다는 내용의 전단이 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인구 데이터는 '인구조사(Zensus)'라는 이름으로 수집됩니다. 독일 통일 후 첫 인구조사는 2011년에 시행되었으며, 그다음 인구조사는 2022년 봄에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