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rsten Philipps 작성 | 1989년 11월 10일 NDR 1 Welle Nord — 슐루투프(Schlutup) 국경 교차점에서의 동서독 인사
"이상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눈부신 헤드라이트 사이로 첫 번째 트라반트(Trabi)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슐루투프의 호르스트 슈반케(Horst Schwanke)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뤼베크-슐루투프 국경에서 동독 시민들을 맞이한 최초의 서독인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당시 48세의 은행 직원이었던 그는 "트라반트를 몬 남자가 필스 맥주 한 병을 들고 나에게 건배를 건넸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 11월 10일, 수많은 시민들이 트라반트를 몰고 슐루투프 국경을 넘었습니다.
평소라면 아내 트라우테(Traute)가 거의 매일 저녁 함께 국경 앞까지 산책을 하곤 했지만, 그날은 열이 나 집에 누워 있었습니다. 남편과 같은 나이인 68세의 트라우테 슈반케는 "국경을 따라 숲과 물가를 걸으며 서독 국경수비대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언제나 흥미로웠다"면서도, "우리 부부는 그날 저녁 뉴스를 보지 못했고,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와의 기자회견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역사의 물결에 압도되다
남편이 문자 그대로 그 사건에 압도될 만했습니다. "잠시 후 또 다른 트라반이 나타났고, 또 하나가 이어졌습니다. 어느새 수백 대가 등장했죠. 갈색과 파란색이 뒤섞인 트라반트로 이룬 길이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눈사태가 슐루투프를 통과했습니다. 제가 계속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뤼베크로 가는 길'이라고 답했습니다." 호르스트 슈반케는 그날 저녁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바로 다음 날, 슐루투프가 "작은 동네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분명해졌습니다. 수천 명의 뤼베크 시민들이 동독 주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국경 지역으로 몰려왔고, 트라반트 행렬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수라장이었죠. 2행정 엔진의 배기 가스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고, 하늘은 파랗게 물들었으며, 거리는 거의 24시간 내내 정체됐습니다."
며칠 뒤, 국경 마을 주민들의 분위기에는 변화가 찾아옵니다. 초기의 환희 이후 슈반케 부부를 비롯한 많은 슐루투프 주민들이 대규모 차량 행렬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트라우테 슈반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발트해 연안의 샤르보이츠(Scharbeutz)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교통 체증에 갇혀 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차를 두고 영하의 추위 속에서 하이힐을 신고 4킬로미터를 걸어 집에 도착했더니 발에 물집이 잡혔답니다."
뤼베크-슐루투프 국경 교차점의 푸른 안개
1989년 11월 11일, 뤼베크 시민들이 동독 주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물자 공급도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점차 슐루투프에는 식량이 부족해졌지만, 슈반케 부부는 상점 앞에 진열된 과일과 채소에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염 물질이 걱정됐거든요!" 호르스트 슈반케가 웃으며 말합니다. 그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슈반케 가족은 이 짜릿했던 시절을 기쁨으로 회상합니다. "상상조차 못했던 일을 바로 곁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1967년, 슈반케 부부는 국경에서 아들 죠렌(Sören)을 아슬아슬하게 구했습니다. 네 살이었던 아이가 얼어붙은 연못 위로 달려나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잠시 주의를 놓은 사이, 국경 바로 앞까지 다다른 아들을 호르스트 슈반케는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동독 병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아마 1미터만 더 나갔어도 총을 쏘았을 겁니다." 부부는 국경 바로 옆에서 살았지만, 이런 일은 일상이 아니었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었습니다. 개들의 끊임없는 짖는 소리는 특히 트라우테 슈반케에게 괴로웠습니다. "그 울음소리를 늘 들었고, 목줄에 묶인 개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 야위어서 배고파 짖었을 겁니다."
1950년대 후반, 슐루투프 국경 교차점 앞의 호르스트 슈반케(오른쪽).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일도 기억나는군요. 호르스트 슈반케의 삼촌은 여전히 동쪽에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삼촌을 쫓아내고 금시계를 빼앗았으며, 다시는 그곳에 나타나지 말라고 총구를 겨눴다고요."
동독에서의 보물찾기
그럼에도 국경 마을 주민으로서 슈반케 부부는 늘 동쪽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슈반케 가족은 국경 간 왕래에서 큰 역할을 했고, 1973년부터 무려 30여 차례 동독을 방문했습니다. 두 나라의 변화를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고, 동서 양쪽에서 많은 유사성도 발견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술에 취한 사람 넷이나 다섯이 맥주병을 들고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던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호르스트 슈반케는 지금도 조금 놀란 듯 말합니다.
1973년 첫 동독 여행 역시 생생합니다. 부부는 빨간 폭스바겐 골프를 몰고 볼텐하겐까지 운전했고, 동독 국경수비대와의 조우도 잊히지 않습니다. "트렁크와 보닛을 열게 하더니, 차 안의 모든 물건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트라우테 슈반케가 말합니다. "그리고 볼텐하겐 시장 광장에 스티커를 백 개 넘게 붙인 우리 차를 세워 두었습니다. 다섯 시간 동안 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우리 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아들이 붙인 스티커가 모조리 긁혀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열 살 난 아이는 그것을 보고 펑펑 울었죠."
골동품 수집
당시 동독에는 열대 과일이 없었습니다. "몇 년 뒤에는 그곳에서도 열대 과일을 살 수 있게 됐지만요." 그럼에도 주민들 사이의 분위기는 해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호르스트 슈반케는 "1980년대에는 사람들이 점점 무관심해진 것 같았습니다. 분단된 나라가 언젠가 통일될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슈반케 가족이 1980년대 슈베린 근처에 사는 트라우테의 사촌을 방문할 때마다 목격한 알코올 소비 증가 현상을 설명해 줍니다.
80년대에 몰래 들여온 다리미를 갖고 있는 트라우테 슈반케.
자수와 골동품 다리미의 열렬한 수집가였던 트라우테에게 동독은 엘도라도였습니다. "자주 물건을 몰래 옮겼고, 들킬까 봐 늘 조마조마했습니다. 한번은 배에 스타킹을 감고 19세기 자수를 옮긴 적이 있는데, 다행히 잘 됐습니다." 또 한 번은 쓰레기봉투로 위장한 가방에 다리미를 숨겨 넘어가다가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트라우테 슈반케와 그녀의 남편은 "오늘날 아무 문제 없이, 스트레스 없이 슈베린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참 좋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라고 덧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