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 28일, 제20회 하계 올림픽이 정식으로 개막했습니다. 대회의 대부분 경기는 뮌헨과 바이에른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진행되었지만, 요트·항해 경기만은 예외적으로 북독일의 항구 도시 킬(Kiel)에서 열렸습니다.
1936년 베를린 대회 이후 독일이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한 해였고, 킬에게도 36년 대회에 이어 두 번째 올림픽 항해 무대였습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도(州都) 킬은 인근 트라베뮌데(Travemünde)와의 유치 경쟁 끝에 항해 경기 개최지로 선정되었으며, 대회 기간 동안 약 50개국 선수단이 킬에 집결해 여섯 개 요트 종목의 메달을 놓고 겨루었습니다.
실크제 항구, 올림픽을 위해 두 배로 확장
1930년대와 달리 이번 대회의 무대는 도심 한켠 힌덴부르크 강변의 올림픽 항구가 아니라, 열린 발트해를 정면으로 마주한 북쪽 외곽의 실크제(Schilksee) 지역이었습니다.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물가 바로 옆에 올림픽 센터가 들어섰고, 그 안에는 공식 행사 공간과 선수 숙소가 마련되었습니다. 실크제 항구 전체는 대회를 앞두고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몰려올 인파에 대비한 새로운 도시 인프라도 속속 완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내버스 터미널(ZOB), 넓게 재정비된 알터 마르트(Alter Markt, 구 시장 광장), 그리고 킬리니에(Kiellinie) 해안 산책로의 전면 개선이 그 결과물입니다.
“세계로 통하는 길”, 킬에 A7 고속도로 연결
교통망 확충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킬은 이 대회 덕분에 A7 고속도로와의 직접 연결, 킬 운하를 가로지르는 신규 교량, 연방도로 B503 개량이라는 실질적인 혜택을 얻었습니다. 교통망 개선에는 약 1억 1천만 마르크가 소요되었으며, 이 비용은 연방정부가 부담했습니다. 실크제 일대 체육 시설에 투입된 약 8,200만 마르크는 연방정부가 절반을, 나머지는 주와 시가 나누어 부담했습니다.
당시 군터 반처(Günther Bantzer, SPD) 킬 시장은 이를 “금방 다시 얻을 수 없는 횡재”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보도 국장 베르너 이스텔(Werner Istel)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잠시나마 변방의 세계적 도시가 되었다. 총 사업비는 약 5억 마르크였는데, 시는 협상 끝에 그중 5%만 부담했다. 그리고 함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그야말로 세계로 통하는 연결이었다!”
누가 킬에서 올림픽 성화를 밝히는가
개막식을 앞두고 성화 점화 주인공을 둘러싼 작은 반전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렌테(Malente) 체육 기숙학교 학생이자 육상 선수인 우베 브란덴부르크(Uwe Brandenburg)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체육협회의 선택을 받아 킬-실크제 항구에 올림픽 불꽃을 밝힐 주인공으로 내정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12개 종목에서 전국 챔피언에 오른 그는 당대 가장 성공적인 젊은 스타 선수였고, 이 영예로운 임무를 맡기에 충분한 인물이었습니다.
후안 카를로스와의 대화, “평생 잊지 못할 경험”
그러나 개막 두 주 전, 브란덴부르크에게 통보가 도착합니다. 조직위는 발트해에서 열리는 항해 경기를 여는 상징으로 ‘요트 선수’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종 주자로 낙점된 이는 16세 요트 선수 필립 루비누스(Philipp Lubinus)였고, 브란덴부르크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구간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는 뜻밖의 선물이 찾아왔습니다. 스페인 선수단 단장, 곧 훗날 국왕이 되는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와 나눈 대화였습니다. “정말 좋은 대화를 나누었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성화봉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람 부는 북부 해안을 위한 특별 성화봉
성화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발트해 연안까지 무사히 도착하도록 세밀한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성화는 올림피아에서 출발해 뮌헨을 거쳐 킬까지 무려 5,500km를 달려야 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킬 구간만 해도 약 95명의 주자가 필요했습니다. 피네베르크(Pinneberg)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민들이 불꽃을 이어받아 한 사람당 1km씩, 뵈닝슈테트, 렌트페덴, 바드브람슈테트, 보르데스홀름을 거치며 북쪽으로 달렸습니다.
문제는 성화불이 자꾸 꺼질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조사가 발트해의 강풍도 견딜 수 있는 특제 성화봉을 개발하면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올림픽에 들떤 도시, 킬
전체적으로 이 대회는 도시에 큰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우베 브란덴부르크는 몇 년 전 회고에서 “올림픽 항해 대회 덕분에 다소 잠들어 있던 주도 킬이 스포츠 수도로 탈바꿈했다”고 말했습니다. 킬 시민들 역시 코앞에서 열린 올림픽을 대체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반처 시장 역시 “가치 있었다고 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기회가 다시 온다면 곧바로 또 하겠다”며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함부르크의 반대표, 좌절된 2024년 독일 유치
2024년 하계 올림픽은 독일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유치 후보였던 함부르크는 이번에도 킬을 항해 경기장으로 내세웠습니다. 2015년 주민투표에서 킬 시민들은 근소한 차이로 올림픽 북부 유치에 찬성했지만, 함부르크 시민들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결국 2024년 대회는 파리가 개최하게 되었고, 항해 경기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펼쳐집니다. 킬이 다시 올림픽 항해 무대에 서는 날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