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1월 1일, 함부르크는 프랑스 제국에 편입됩니다. 다부 원수가 엘베 강 유역을 관할하게 되죠. 함부르크는 1806년부터 포위 상태에 놓였으며, 1814년까지 파괴와 추방이 만연했습니다.
야닌 퀄(Janine Kuehl)
포위전의 비극적 절정
포위전은 1813년 12월 7일 참혹한 절정에 이릅니다. 함(Hamm) 지역이 불바다로 변한 것입니다. 함부르크 교외의 작은 마을 하나가 화염의 희생물이 되었고, 주민들은 짐을 꾸려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극심한 혹한이 몰아치던 1813/14년 겨울,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화재는 함부르크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방어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해자 앞쪽에 소위 '글라시(glacis)'라고 불리는 완만하게 경사진 흙언덕을 조성했는데, 적군 방향에는 초목도 건물도 없는 개활지였습니다. 연합군, 특히 러시아군이 한자 도시 주변으로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프랑스군은 성벽 앞에 사격이 가능한 개활지를 확보하기 위해 교외 지역을 철거하거나 불태웠습니다. 동시에 적군이 그곳에 진지를 구축할 발판도 차단한 것이죠.
함부르크, 프랑스의 영토가 되다
함(Hamm)이 사라진 것은 나폴레옹이 함부르크 요새를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함부르크는 1806년부터 몇 차례의 중단과 형태 변화를 거치며 프랑스의 점령 하에 있었습니다. 영국과의 무역 금지령은 일부 함부르크 무역상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었고, 실업과 빈곤을 심화시켰습니다. 1811년 1월 1일, 함부르크는 엘베 강 하구 데파르트망(주)의 수도로서 프랑스 제국에 공식 편입됩니다. 루이 니콜라 다부(Louis Nicolas Davout) 원수가 엘베 강 유역을 총괄하게 되죠.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민법전)은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며 함부르크의 기존 도시법을 대체했고, 시민 자치회 대신 시의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프랑스식 행정 기구 설치와 더불어 새 통치자들은 수많은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주로 하층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엘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함부르크와 하르부르크를 연결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엘베 강 위에 다리를 건설했습니다. 19세기 초 대부분 철거되었던 함부르크의 성벽은 1813년 가을, 함부르크 시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재건됩니다. 또한 프랑스군은 함부르크에서 엘베 강의 빌헬름스부르크 섬을 거쳐 하르부르크 요새까지 이어지는 다리 건설을 명령했습니다. 이 다리는 계획된 제국도로(파리-베젤-함부르크-뤼베크)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뚝 위에 판자를 깔은 이 목교는 북엘베와 남엘베를 오가는 페리를 대체하지는 못했습니다.
교회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
성 미카엘리스 교회와 증권거래소를 제외한 모든 교회는 군수품 창고와 마구간으로 변모합니다. 다부는 병력을 위해 주변 시골에서 물자를 도시로 반입했습니다. 그리고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6개월 치 식량 비축을 의무화했지만,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3만 명 이상이 강제 추방당하다
1813년 성탄절 밤, 사람들은 성 페트리 교회에서 다음 날 아침 추방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점령군은 지침을 철저히 준수했습니다. 1813년 12월 중순부터 그들은 도시의 성문을 폐쇄했고, 정오 무렵에만 문을 열어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떠날 수 있게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는 자들은 강제로 도시에서 내몰렸습니다. 결국 3만 명이 넘는 '쓸데없는 입'들, 즉 당시 인구의 거의 4분의 1이 함부르크를 떠나야 했으며, 대부분 성탄절 전후 기간에 추방당했습니다. 12월 24일에 6천여 명, 27일에 약 2,500명, 31일에 약 1,200명이 떠났습니다. 시민 추방은 이듬해 3월 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2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 프랑스 군인들은 수천 명의 가난한 시민들을 집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추위 속에서 다음 날 아침 추방되기 전 밤을 성 페트리 교회에서 보냈습니다.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동맹국인 덴마크령 알토나로 향했고, 그 이동 과정에서 1,138명이 추위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외 지역의 '계획적 파괴'
그 겨울 내내 함(Hamm) 같은 교외 지역들은 사격 개활지 조성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1813/14년 겨울에는 함부르거 베르크(오늘날 장파울리), 아임스뷔텔, 로터바움, 베르게도르프, 마름스토르프 등 다른 교외 지역에서도 '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1814년 3월 말, 점령군은 함부르크 남쪽의 마름스토르프와 아펠뷔텔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프랑스 점령군은 그곳에서 식량을 확보하고 연합군 진지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살집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주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이들이 알토나, 뤼베크, 브레멘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1814년 5월 말, 다부는 러시아군 사령관 베니히센(Bennigsen) 장군에게 한자 도시를 항복시킵니다. 러시아군은 1815년 1월 15일까지 함부르크에 머물렀습니다. 포위전과 그로 인한 고통은 도시와 주민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1800년 13만 명이던 인구는 1814년에는 10만 명으로 급감했습니다.
프랑스 시대, 저주인가 기회인가?
포위 기간 동안 특히 가난한 이들은 실업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 결과 함부르크 역사학자 헬무트 슈투베 다 루츠(Helmut Stubbe da Luz)에 따르면 "특히 서민층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정서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고된 포위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현대화로 여기는 각종 혁신들이 함부르크에서 계속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 법전과 이에 따른 모든 시민의 법적 평등은 옛 신분 질서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프랑스 치하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되던 행정 조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프라 분야의 상황도 같았습니다. 민간에서도 매우 유용했던 함부르크-하르부르크 목교는 철거되었고, 프랑스가 건설한 도로는 필요한 수준의 관리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시대의 많은 혁신과 개혁들은 훗날에야 비로소 다시 받아들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