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함부르크 신청사 개관 이야기: 대화재 이후 55년 만에 완성된 한자동맹 도시의 자부심

작성자: Dirk Hempel, NDR.de

1897년 10월 26일, 화요일. 그러나 함부르크에는 평범한 근무일이 아니었습니다. 항구의 공공 건물과 선박마다 기념 깃발이 게양되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오전 9시, 도시의 5대 주요 교회 탑에서 합창이 울려 퍼지며 특별한 하루의 막이 올랐습니다.

화가 휘고 보겔(Hugo Vogel)은 이날 상원의원들이 입장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함부르크 시청의 시장 집무실 벽에 걸려 있습니다.

한 시간 뒤, 시청 광장에는 축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졌습니다. 오전 11시경, 예복을 갖춰 입은 상원의원들이 대연회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650명의 초청 손님이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의 성직자, 명문 함부르크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무거운 황금 사슬을 목에 건 인근 도시의 시장들까지.

이들은 모두 한 건물의 개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수년간의 논쟁과 논의 끝에 마침내 새 시청사가 문을 연 것입니다. 기초석이 놓인 지 11년이 흘렀습니다. 약 450만 골드마르크로 추산되었던 건설 비용은 최종적으로 1,100만 마르크, 현재 가치로 약 8,000만 유로에 이르렀습니다. 두 배 이상의 예산 초과였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웅장함이었습니다. 뫈케베르크(Mönckeberg) 시장은 "무엇보다 이 우아함과 넉넉한 공간에 익숙해져야겠습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55년간 시청 없이 지낸 도시, 함부르크

그동안 함부르크의 상원과 시민의회는 임시 거처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1842년 5월 '대화재' 당시 화염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트로스트브뤼케(Trostbrücke)의 구 시청사가 통째로 폭파된 이후였습니다. 상원과 의회는 아드미랄리티트슈트라세(Admiralitätsstrasse)의 고아원 등 임시 공간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 수차례의 건축 설계 공모가 열렸지만, 약 200개에 달하는 디자인이 모두 거부되었습니다. 함부르크 상원의원의 아들이자 건축가인 마르틴 할러(Martin Haller)가 주도권을 잡으면서야 상황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청사 건설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고, 1880년 시청 건축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협회를 이끈 9명의 함부르크 건축가들은 화려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디자인으로 승인을 받아냈고, 1886년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참나무 말뚝 위에 세워진 궁전

새 시청은 주변 어느 건물보다도 우뚝 솟은 인상적인 건축물로 완성되었습니다.

클라이네 알스터(Kleine Alster)변의 습지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길이 12미터에 달하는 약 4,000개의 참나무 말뚝을 땅속 깊이 박아 넣어야 했습니다. 그 위에 노동자들은 미터 두께의 콘크리트 기초를 부었고, 그 위로 보른홀름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기단이 세워졌습니다.

새 건물은 대화재 이후 재건된 알스터 아케이드(Alster Arcades) 인근에 자리 잡았습니다. 재건된 도심의 모든 건물 위로 112미터 높이의 탑이 권력의 상징으로 솟아 있습니다. 커다란 시계 아래에는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는 전설의 불사조 조각과 1842년 구 시청사의 부조가 새겨져 있어, 도시가 재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낮은 날개 건물은 본관과 증권거래소를 연결합니다. 이러한 근접성은 도시 공화국의 정치인과 상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시청 안뜰의 분수는 불과 5년 전 8,605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 유행병을 기리며, 그리스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Hygieia)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우물과 에어컨, 19세기의 첨단 기술

히게이아 분수는 조각가 요제프 폰 크라머(Joseph von Kramer)의 작품입니다. 여신 발치에 놓인 여섯 개의 조형물은 물의 다양한 용도를 보여줍니다.

이 분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술적 경이로움이기도 했습니다. 분수는 시청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에어컨 시스템의 흡기구 역할을 했습니다. 바닥에는 개구부가 마련되어 있어, 끊임없이 흐르는 우물물로 냉각된 신선한 공기가 전기 팬의 힘을 빌려 개별 사무실과 홀로 유입되는 구조였습니다. 배기 공기 역시 같은 방식으로 회수되어 탑으로 이동한 뒤 탑 헬멧의 구멍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겨울에는 지역 난방이 사용되었습니다. 포스트슈트라세(Poststrasse)의 전력 센터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가 지하 파이프를 통해 건물로 공급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정부, 의회, 행정기관이 한 지붕 아래에

개관 이후 상원, 시민의회, 재무대리인, 국가기록보관소 등 주요 기관이 새 건물에서 한자리에 일하게 되었습니다. 개장 직후부터 시민들도 시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공사는 1901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원래 디자인이 너무 많이 변경되자 마르틴 할러는 자신의 평생의 작품을 외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192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이 건물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청 내부에는 대소 강당과 회의실을 포함해 총 647개의 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건물의 핵심은 오늘날에도 시 정부의 심의가 진행되는 상원 회의실과 한자도시 함부르크의 대표 기관인 시민의회 회의장입니다. 시민의회는 1919년 3월, 함부르크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성인 주민의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시위의 광장이 된 라트하우스마르크트

시청 앞 광장은 2017년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시위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시청은 오랜 세월 정치적 항의의 무대가 되어 왔습니다. 1906년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가 계획된 선거권 개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1918년 11월 혁명기에는 사회주의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집회에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958년 4월에는 막스 브라우어(Max Brauer) 시장이 독일연방군의 핵무장에 반대해 모인 12만 명이 넘는 시위대 앞에서 "핵사멸과의 싸움"을 경고했습니다. 1983년 10월에는 NATO 복군주의 결정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시민이 이곳에 모였습니다.

시청을 찾은 국빈들

함부르크의 시장들은 시청에서 수많은 귀빈을 맞이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1954년에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가 코끼리 엄니 두 개와 창 두 개를 선물로 받았고, 1967년에는 항의하는 학생들 속에서 페르시아의 샤(Shah)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관례에 따라 시장은 시청 계단 꼭대기에서 손님을 맞이하는데, 1965년 폴 네버만(Paul Nevermann) 시장만이 유일하게 여왕을 향해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 예를 표했습니다.

오늘날 함부르크 시청은 정부와 행정의 중심이자 의회 건물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도시 최고의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매일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홀의 벤치는 누구나 잠시 머물며 건물의 품격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120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입구 문 옆의 금속 대야에서는 여전히 신선한 식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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