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고통은 대중에게 어디까지 재현될 수 있을까? 가장 큰 난제는 전장을 끊임없이 목격하게 하면서도 영웅심과 희생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군의 이미지와 희생자의 문제는 수백만 명의 신병이 최전선으로 떠나기 위해 가족을 등져야 했던 제1차 세계대전기에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전장의 현실과 영웅 서사를 함께 담아내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엽서: 선전과 심리적 지원 사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엽서는 대량으로 제작·배포되었다. 엽서는 대중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부상병들이 어떤 식으로든 보호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했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벌어지는 죽음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이 마지막 문제는 오랫동안 우회되었는데, 편집자들이 대중의 감수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민감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 자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는 점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태도도 변했고, 1914년까지 여론을 지배하던 19세기적 낭만 정서는 불과 2년 만에 크게 사라졌다.
전쟁 소식지와 달리 엽서는 다른 종류의 문서가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엽서의 수는 사회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낸 질적 수준을 반영한다. 엽서는 사회에 뿌리내린 신화적·종교적 소재를 활용해, 위로의 맥락 안에서 죽음을 조망하는 경우가 많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장면을 그린 수많은 엽서가 19세기 감성을 모방한 반면, 전투를 더욱 잔혹하고 치명적이며 유혈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도 점차 커져갔다. 수많은 죽음을 애도해야 했던 시대에 대중은 전쟁의 더 정확한 묘사를 요구했던 걸까, 아니면 값싼 대중잡지를 통해 확산된 선정적 서사의 영향을 받은 걸까. 참전 군인들은 최전선의 생활이 뉴스에 담기는 '위생적인' 방식에 종종 좌절을 토로했다. 한 가지 차이점은 19세기 군사 회화 대부분이 사건이 끝난 뒤에 그려진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엽서는 진행 중인 전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선전 도구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 시대의 묘사에서 죽음의 주인공은 대부분 적이었는데, 이는 승리 여부와 무관하게 적군의 우월성과 기량을 암시하는 장치였다. 아군 일부는 그들이 상징하는 실제 위험을 상기시키기 위해 쓰러져야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 싸우는 이들의 용기와 희생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이어져, 엽서 속 전투 장면이 구성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군사 테마를 담은 실물 사진 엽서에도 스튜디오 촬영이 폭넓게 활용되었다. 모의 세트에서 제작된 이 이미지들은 포즈가 너무 잘 짜여 있어 마치 극장이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는 전쟁에 대한 통념을 이루는 낭만적 수사와 실제 폭력·파괴를 분리하는 데 한몫했다.

좋은 동지(Ich hatt' einen Kameraden): 혼자 죽지 않는 병사들
엽서 속 모든 장면은 더 큰 목적을 위해 극기를 든 병사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좋은 죽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은 혼자 죽거나 고통 속에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끝까지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서사에서 죽어가는 군인은 외롭지 않고 친곁에 있다.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한 신비로운 영적 연결도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이미지는 순전한 환상은 아니었다.
이 주제는 오스트리아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Ludwig Uhland)가 1809년에 쓴 시 〈좋은 동지〉에서 유명해졌다. 나폴레옹에 맞선 티롤 반란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정치적 이슈보다 개인적 상실을 다루고 있어 보편적인 공감을 얻었다. 가사가 대중적인 민요로 개편된 뒤에는 전 세계 수많은 군대의 행진 성가로 쓰였다. 이 보편적 주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널리 불렀으며, 민속 예술을 통해 대량 생산되어 각국 엽서 속 군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자 최전선의 병사들은 전쟁의 현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대부분의 군인은 포격으로 사지가 찢기고 끔찍한 상처를 입은 채 목숨을 잃었다. 이 죽음은 종종 익명으로 닥쳤다. 적도, 자신을 죽인 무기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였다. 엽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영성주의와 애국심: 천사, 그리스도, 그리고 죽음의 의인화
죽어가거나 죽은 군인을 다룬 수많은 묘사에는 강한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곁에 있는 인물은 천사일 수 있지만, 때로는 승리의 우화와 구별하기 어렵다. 특정한 상징적 특징들이 존재했지만, 당시 일러스트레이터들은 고전적 전통보다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 더 크게 의존해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사가 죽은 군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라면 식별이 훨씬 쉽다.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형상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혼동은 없다. 그분은 정기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죽어가는 군인을 위로하거나 죽은 자를 천국으로 보내는 모습으로 흔히 발견된다. 때로는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위에 서 있는 고통스러운 자세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런 반전적 메시지는 검열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라는 추상성을 벗어나 비극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그린 일부 엽서에는 사망 시의 위로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다. 여기서 죽음은 전장에서 전사자의 동반자이자, 살육의 파트너가 된다. 의인화된 죽음은 적을 제거하기 위해 포병이나 군인의 총구를 조준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엽서는 아마도 섬뜩함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주의가 문화의 일부였기에 검열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상징은 이미 군인의 기량과 힘을 나타내는 휘장으로도 쓰였다. 그럼에도 검열이나 실제 죽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엽서의 수는 많지 않았다.
다양한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이 해골로 의인화된 죽음과 마주치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15세기 초 중세 미술에 등장했다. 죽음의 불가피성을 설교하는 이 우화는 100년 후 한스 홀바인(젊은 쪽)의 목판화를 통해 대중화되었다.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죽음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접근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예술가들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우화를 현대적으로 갱신했지만, 초기 목판화 해석에 대한 찬사로 목판화 형식을 그대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이 모티프는 군인을 표현하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


군사 회화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더 크고 영웅적이며 극적인 전쟁 서사를 담아내도록 다듬어졌다. 전장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 군인 화가 에두아르 디테일(Édouard Detaille, 1848~1912)을 예로 들 수 있다. 1870년 전쟁 당시 육군 제8기동대대에 참전했던 그는 전쟁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때로는 투박하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한 그의 유명한 군인 초상화와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사진: 죽음을 포착한 기록
죽은 이를 담은 사진으로 인쇄된 엽서는 매우 드물다. 필름에 정확한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 곳에서 사망한 뒤 그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관심사였다.
목숨을 바친 군인의 모습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된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은 선전전의 진정한 비극을 보여주었다. 이런 묘사가 용인된 것은 죽은 이의 처우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적의 야만성을 드러내려는 데 있었다. 동시에 이 이미지들은 이 전쟁이 모든 사람에게 위험하므로 모두가 전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사진에는 시신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거리에 방치된 무심함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담겨 있다. 이 이미지들은 죽음뿐 아니라 사회 질서의 붕괴까지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카메라가 휴대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진 최초의 전쟁 중 하나였다. 캐나다 군인 잭 터너(Jack Turner)는 몰래, 사실상 완전히 불법적으로 카메라를 최전선으로 가져왔다(아래 사진: 1917년 비미 능선 전투).

20세기에 들어 전문 사진기자들은 로버트 카파를 비롯해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모든 주요 분쟁을 취재했다. 카파는 1954년 5월 인도차이나에서 지뢰에 의해 생을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전선에 걸친 전쟁을 취재하는 방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44년 6월 6일, 부상당한 승무원을 소생시키려 애쓰는 젊은 미국 중위의 모습을 담은 종군기자 월터 로젠블럼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사진 기술은 계속 발전하여 정보에 굶주린 대중에게 사실성을 제공했고, 새로운 모병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동기 부여 수단이 되었다.
특정 사건을 한 장의 회화로 표현해야 했던 것과 달리, 사진은 대량의 이미지가 유통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사진 이미지의 확산은 대중이 전쟁 담론에 정통하게 만들었다. 대량 복제된 전쟁 영상의 등장은 일반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자 역사 기록의 역할도 수행했다.
대량 생산된 이미지는 결과도 낳았다. 대중에게 정보를 전하는 것 외에도, 방송 이미지의 과잉은 시장을 포화시켜 시청자가 특정 사진의 즉각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진기자들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분쟁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더 읽어볼 자료
https://www.cairn.info/revue-guerres-mondiales-et-conflits-contemporains-2011-1-page-51.htm
https://centenary.org
https://education.francetv.fr
https://first-war-world-1914-1918.com
https://www.ww1-propaganda-cards.com/alberto_martini(1).html
https://www.pedagogie.ac-aix-marseille.fr/upload/docs/application/pdf/2017-01/dossierpedacartespostales14182.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