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 조약 이후 프랑스 디렉토리는 세계 3위 규모의 스페인 해군을 필요로 했기에 스페인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영국에 맞선 프랑스·스페인의 전통적 동맹 관계로 회귀하면서 나폴레옹과의 동맹이 시작되었고, 그 결실이 바로 산일데폰소 조약(1796)입니다.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사실상 프랑스의 보조국으로 전락했고, 다음 해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유럽 전역에서는 영국군이 산비센테 곶 해전(1797년 2월 14일)에서 스페인 함대에 참패를 안겼습니다. 미주 방면에서는 영국이 오리노코 강 어귀 앞에 위치한 트리니다드 섬을 점령해 밀수 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내우외환: 고도이 정권에 대한 반감
국내 정세 역시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계몽 엘리트들은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깊은 실망에 빠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정직하고 존경받던 판사 호베야노스(Jovellanos)입니다. 잠시 요직을 맡았으나 불명예스럽게 지방으로 추방당했습니다. 대중 계층은 고도이(Godoy)에게 끊임없는 적대감을 드러냈고, 궁정은 커지는 불만과 폭력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도이는 물러나야 했지만, 지난 수년간 쌓아 온 명성과 보상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고도이는 공식적으로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국왕의 신뢰는 여전히 유지했습니다. 카를로스 4세는 고도이와 상의 없이는 어떤 일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의 패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돕는 불명예스러운 역할을 자처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오렌지 전쟁과 트라팔가의 참화
스페인은 프랑스가 영국의 동맹국 포르투갈을 압박하기 위해 계획한 원정에 동참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오렌지 전쟁(1801년 2월)으로, 고도이가 스페인군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영국을 굴욕시키기로 마음먹은 나폴레옹은 두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는 영국 본토를 침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무역을 파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상은 프랑스가 스페인에 개입하는 근원이 되었고, 스페인 정부는 해군을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내놓아야 했습니다.
카디스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집결했지만, 항구를 출발하려던 순간 영국 제독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805년 10월). 이 전투로 스페인은 엔세나다 후작 시절부터 수십 년간 기울여 온 노력이 무색하게 해군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습니다. 넬슨은 두 함대를 모두 격파했습니다.

고도이는 포르투갈이 나폴레옹이 명령한 대륙 봉쇄를 영국산 제품에 적용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원정에도 동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개인적 이익을 약속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1807년 10월, 프랑스 황제는 브라간자 왕가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분할될 예정이었고, 알가르베 왕자로 칭해질 고도이는 포르투갈 영토 남부에 대한 주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퐁텐블로 조약(1807년 10월 22일)이 시행되면서 프랑스군은 스페인 영토를 통과해 포르투갈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프랑스군은 안달루시아로 향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고도이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전역 점령을 노린다고 의심했고, 카를로스 4세에게 수도를 떠나 세비야로 갈 것을 조언했습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왕가는 포르투갈 왕가처럼 미주 대륙으로 피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란후에스 폭동과 바욘의 굴욕
카를로스 4세는 고도이의 조언을 따랐지만, 아란후에스(Aranjuez)보다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미 수개월 동안 고도이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국가의 모든 불행을 고도이 탓으로 돌리고, 과도한 개인적 야망을 지녔다고 비난했습니다. 1807년 1월에는 '스페인 및 인도 제도 대제독'이라는 새로운 칭호가 더해졌는데, 이는 그를 왕족으로 편입시키는 '전하' 경칭과 함께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전은 그의 정적들이 왕태자 돈 페르난도(Don Fernando) 주위로 모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아버지 카를로스 4세를 대신해 페르난도를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음모는 엘 에스코리알에서 실패했습니다(1807년 10월). 그러나 두 번째 음모는 1808년 3월 17일 아란후에스에서 성공했습니다. 이틀 뒤 카를로스 4세는 고도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의 모든 작위를 박탈해야 했지만, 군중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카를로스 4세는 3월 19일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난도 7세가 통치를 시작했지만, 스페인 영토에 주둔한 프랑스군 덕분에 나폴레옹은 위기에 처한 스페인 왕실의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그 아들을 바욘(Bayona)으로 유인해 두 사람 모두에게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의 형제 호세 1세를 스페인 왕좌에 앉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