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구몽 샤토(Château de Hougoumont)
영국-연합군 총사령관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직접 시찰할 기회가 있었기에 요새화된 농장의 존재는 물론, 그 방어력과 프랑스군의 공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어 거점으로서의 가치까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은 숲 너머에 어떤 진지가 펼쳐져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프랑스군이 우구몽을 향해 퍼붓은 공격은 성공에 필요한 충분한 병력과 유기적인 협동이 결여된 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가 한순간 갈릴 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대략 낮 12시 30분경, 세 번째 공격에 나선 프랑스군은 농장 단지를 서쪽에서 포위한 뒤 북문 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북문은 수비대가 능선에 주둔한 아군과 연락을 주고받던 통로였지만 아직 봉쇄되지 않은 상태였고,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문을 부수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가장 먼저 몸을 던진 이는 제1경보병연대 제2대대 제1중대의 소위 르그로(Legros)였다. '뚫는 자(l'enfonceur)'라는 별명을 지닌 전직 공병 상사 출신의 그를 따라 부하들이 잇달아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부 수비병들은 건물 안으로 후퇴해 사격으로 맞섰지만, 또 다른 이들은 마당 자체에서 백병전을 벌여 적을 밀어내기로 결심했다.
우구몽 단지 서쪽 구역의 방어를 지휘하던 맥도넬(Macdonell) 중령은 이 문을 즉시 닫지 않으면 진지 전체를 잃고 만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는 곁에 있던 장교들, 부사관들, 병사들과 함께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끝내 통로를 닫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뚫는 자'를 비롯한 프랑스 병력 30명이 마당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들은 어린 군북(드럼)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거의 함락될 뻔했던 우구몽 샤토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영국-연합군 승리를 떠받친 핵심 요인 중 하나로 남았다.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단적인 사실이 있다. 프랑스군은 결국 10,000명이 넘는 병력(제2군단 소속 제롬 보나파르트 사단 전체와 푸아 사단 일부)을 이 단일 거점 공격에 투입한 반면, 수비 측 병력은 고작 2,600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