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아드리아노플의 처형자 프리기테르노: 로마를 무릎 꿇린 고트족의 왕

평화를 바라는 자, 프리기테르노의 등장

고트어 이름인 프리투가르니스(Frithugarnis)가 ‘평화를 바라는 자’라는 뜻을 지녔음에도, 역사는 그를 테르빙기족의 지도자 프리기테르노(Frigiterno)로 기억한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발렌스(Valens) 황제에게 다뉴브 강 남쪽, 로마 영토 내 정착을 청원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수년 전 다키아를 고트족에게 양도했는데, 왜 프리기테르노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로마로 넘어오려 했을까?

답은 ‘작은 체구에 사선(斜線) 눈을 가졌고, 말 위에서 활을 능숙하게 다루던’ 자들에게서 찾아야 했다. 바로 훈족(Huns)이다. 서기 376년, 훈족은 오스트로고트족(Ostrogoths, 서고트족)을 학살하고 동로마 제국을 향해 약탈과 파괴의 길을 이어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비시고트족(Visigoths, 동고트족)에게 임박한 위험을 알렸고, 당시 지도자였던 프리기테르노는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의 포에데라티(foederati, 동맹군)가 되는 것이 생존의 유일한 길임을 직감했다.

이해관계의 일치, 그리고 불씨

당시 동방의 카이사르는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렌테(Flavius Julius Valens)였다. 그는 367~369년 고트족을 서부 스키티아(현 모라비아, 발라키아)에서 위협하며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발렌테는 프리기테르노의 제안을 수락했는데, 양자 모두 아리우스파(Arian) 기독교도라는 점이 작용했다. 황제에게 비시고트족과의 전략적 동맹은 공통의 적인 훈족을 막을 최적의 방벽이었다.

비시고트족은 당시 인적 드물고 가난한 속주 모이시아(Moesia)에 정착했다. 이들은 군사 복무와 세금 납부를 조건으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모든 야만인이 강을 건넌 것은 아니었다. 프리기테르노의 부족 내 정적인 아타나릭(Athanaric)은 여전히 이교도 신앙을 고수하며 프리기테르노의 ‘친로마 정책’에 반대해 다키아에 남았다.

아드리아노플의 처형자 프리기테르노: 로마를 무릎 꿇린 고트족의 왕
발렌스 시대의 기병과 군단병

탐욕과 배신, 동맹의 파탄

프리기테르노의 진짜 적은 내부가 아니었다. 교회와 보수적 귀족층이 황제의 결정을 반대했고, 현지 행정관의 과도한 탐욕이 새로운 동맹군을 자극했다. 마르켈리누스나 오로시우스 같은 당대 역사가들의 기록보다 덜 선동적이라는 최신 연구에 따르면, 모이시아에 정착한 야만인은 약 7만 5천 명, 그중 전투 연령 남성은 약 1만 5천 명 정도였다. 여기에 훈족을 피해 도망친 오스트로고트족과 알란족 기병 4천여 명이 합류했다.

377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흉작에 모이시아의 코메스(백작) 루키피누스(Lucipinus)의 횡포가 더해졌다. 그는 포에데라티에게 지급될 물자 가격을 부풀려 막대한 부를 챙겼다. 같은 해 이교도 아타나릭이 강을 건너 동족에게 합류하자 교회는 그를 악마의 화신이라며 경계했다. 루키피누스가 연회에서 프리기테르노를 암살하려 한다는 음모를 눈치챈 프리기테르노는 선수를 쳐 그를 살해했다.

트라키아의 약탈자와 발렌스의 출정

로마와의 유대가 끊기고 백성들의 생존이 달린 식량을 구해야 했던 프리기테르노는 트라키아(Thrace)로 진격해 도시와 농촌을 약탈했다. 소규모 로마 군대 두 개가 손쉽게 격파되자 콘스탄티노플 조정이 경악했다. 발렌테는 페르시아와 대치 중이던 안티오키아(시리아)를 떠나 7개 군단, 약 2만 1천 명의 병력과 더 많은 보조병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향했다. 그가 진을 친 도시는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현 터키 에디르네)이었다.

아드리아노플의 처형자 프리기테르노: 로마를 무릎 꿇린 고트족의 왕
아드리아노플

변질된 군단, 그리고 기병의 시대

발렌테는 유산(遺産)인 빅토르(Victor)와 리키메르(Ricimer)의 보좌를 받으며 비시고트족 진영 앞에 위풍당당한 병력을 배치했다. 7개 군단에는 정예 부대인 팔라티나이(palatinae) 군단과 상당한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 때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4세기의 군단은 이름만 같을 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트라야누스 시대의 군단병과는 달랐다. 긴 스파타(spatha)가 글라디우스를, 둥근 스쿠툼(scutum)이 직사각형 방패를,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 대신 사슬 갑옷을 입었다. 이들은 선조들보다 덜 무장했고, 규율과 전투 의지 역시 떨어졌다.

반면 포에데라티로서 로마식 훈련을 받은 고트족은 다양한 투척 무기와 접촉 무기를 다루며, 로마 진형의 경직성을 피해 기동력을 살렸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무기는 기동성이 아닌 기병대의 전략적 비중에 있었다.

아드리아노플의 대참사, 378년 8월 9일

378년 8월 9일, 발렌테는 아드리아노플 진영에 수하물과 군용 금고를 남겨둔 채 인근 평야에 진을 쳤다. 서방의 공동 통치자이자 조카인 그라티아누스(Gratianus)가 지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었으나, 발렌테는 기다리지 않았다. 아마도 유산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의 부추김이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인상적인 전투의 상세한 전개는 생략하고, 그 결과에 집중하겠다.

고트족 기병대장 알라테우스(Alatheus, 원문 'Winging'은 알라테우스의 오기로 추정)가 취약한 로마 기병대를 격파한 뒤 측면에서 군단병을 괴롭히는 사이, 프리기테르노가 중앙에서 발렌테의 병력을 밀어붙이며 전투는 학살로 변했다. 로마 군대의 3분의 2가 아드리아노플 평야에 남았고, 황제 발렌테 역시 전사했다. 당대 증언에 따르면 피와 배설물, 훼손된 시체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도망칠 길 없는 로마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웠음을 고려하면 고트족의 피해 역시 막대했으리라.

발렌테의 최후에 관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역사(Res Gestae)』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전한다: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XXXI.12)

"발렌테는 부상을 입고 작은 오두막으로 옮겨졌다. 고트족이 그 오두막을 에워싸고 불을 질렀는데, 안에 황제가 있는 줄은 몰랐다." (XXXI.13.14-6)

아드리아노플의 처형자 프리기테르노: 로마를 무릎 꿇린 고트족의 왕
발렌스 황제

진실은 알 수 없으나, 황제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해 평범한 군단병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빅토르와 리키메르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퇴각해 성벽 뒤에 의지하려 했다. 동로마 제국의 유럽 영토 전체가 프리기테르노의 수중으로 떨어졌고, 공성 병기가 없어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포위된 아드리아노플을 제외하고는 모든 도시와 전원이 유린당했다.

프리기테르노의 최후와 새로운 질서의 태동

프리기테르노는 380년 비시고트족의 절대 군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오랜 라이벌 아타나릭이 뒤를 이었으나 1년 만에 사망했다. 381년, 히스파니아 출신의 유신(有臣)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동방의 새로운 섭정이 되자, 그는 고트족에게 철회할 수 없는 포에데라티 지위를 보장했다.

아드리아노플은 군단의 무덤이었다. 이 불멸의 참사 이후 테오도시우스는 국경 방어를 맡은 두크스(dux, 공작) 휘하의 리미타네이(limitanei, 국경군)와, 위기 발생 시 기동하는 야전군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 체제를 정비했다. 이 순간, 봉건제(Feudalism)의 씨앗이 뿌려졌다.


「로마의 숙적들(Archienemies of Rome)」 제20회. 가브리엘 카스테요(Gabriel Castelló)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