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반군 타카리나스(Tacfarinas)

오늘 소개할 로마의 숙적은 불굴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광활한 고향 땅의 자유를 지키려 한 열정적인 수호자였고, 탐욕스러운 침략자에게 맞선 천생 지도자였으며, 황제 티베리우스가 직접 그를 영원히 제거하라고 명령할 때까지 로마 주둔군을 몇 년이나 괴롭혔던 인물입니다. 로마 세계가 존속했던 긴 역사 속에서, 네 명의 서로 다른 집정관(프로콘술)의 관심을 독점했던 부족 지도자는 그 외에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중 세 명이 '사실상 이기지 못한 적'을 물리쳤다는 공로로 로마 거리에서 개선식을 올렸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로마의 숙적들(Archenemies of Rome)' 시리즈 제26화

가브리엘 카스텔료(Gabriel Castelló) 집필

타카리나스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타카리나스는 누구였을까요? 그의 라틴화된 이름은 베르베르 원어인 티카린(Tikfarin)에서 유래했습니다. 그의 반란을 다룬 고전 문헌은 드물지만, 주로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따르면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선사하라 누미디아의 유목 부족 중 하나인 무술라미(Musulami) 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 그도 결국 군단을 보조하는 아욱실리아(auxilia) 기병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바르카 시대부터 이미 고대 최고의 경기병은 북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나왔습니다. 게툴리, 누미디아, 가라만테 기병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때부터 군단의 양익을 담당했습니다.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반군 타카리나스(Tacfarinas)

누미디아 기병

로마의 빵고자, 북아프리카

그런데 어떻게 이 평범한 남자가 수년간 광활한 영토를 들어 로마에 맞설 수 있었을까요? 카르타고 멸망 이후 북아프리카는 언제나 로마에게 매혹적인 먹잇감이었고, 그만큼 철저히 착취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모로코 남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를 황량한 반사막, 인간과 신 모두에게 잊힌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키피오 형제의 시대, 여기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그곳은 전혀 달랐습니다.

로마가 '프로콘술라르 아프리카(Proconsularis)' 또는 '노바 아프리카(Nova Africa)'라고 불렀던 지역, 즉 오늘날의 튀니지와 알제리 동부 일대는 서지중해 최대의 곡창지대였습니다. 당시 이 지역의 인구는 약 150만 명으로, 같은 시기 브리튼보다 많았습니다. 시칠리아, 이집트, 아프리카가 합쳐 생산하는 밀은 제국 전체를 먹여 살릴 만큼 풍부했습니다. 이 땅의 심각한 사막화는 중세 후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시대 세계는 매우 심각한 기후 악화를 겪었는데, 북쪽은 워낙 추워져 발트해의 게르만 민족들이 남쪽의 따뜻한 땅을 찾아 떠나야 했고, 아프리카의 극심한 폭열은 리비아와 알제리의 대초원을 말라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지리학자들이 남긴 이 땅에 대한 기록은 관개 농경지와 올리브 나무, 밀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오아시스와 모래만 남은 곳에서 말입니다.

반란의 씨앗

불명확한 남방 국경에 대한 체계적인 압박이 부족했던 탓에, 기원전 19년 갈리스 출신 아프리카 프로콘술 L. 코르넬리우스 발부스가 가라만테 원정에 성공한 이후, 그 광대한 지역을 통제하는 것은 단 하나의 군단, 즉 테베스테(Thveste, 현 알제리 테베사) 근교에 주둔한 제3 아우구스타 군단뿐이었습니다.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인들의 대토지 소유는 유목민들의 방목지를 끝없이 잠식했고, 유목민들은 건조한 남쪽으로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지주에 대한 복종 혹은 강제 이주는 수없이 많은 소규모 분쟁을 낳았고, 발부스가 해결한 분쟁 역시 연이은 로마의 진압 끝에 5천 명이 넘는 토착민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반군 타카리나스(Tacfarinas)

테베스테 유적

각지 총독들의 탐욕과 무자비함은 대규모 반란의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냈습니다. 불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욱실리아 내부에서 튀어올랐습니다. 로마에 수년간 복무한 끝에 타카리나스는 탈영합니다. 어느 불의에 대한 충동적 반발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성숙한 반란 계획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서기 15년의 일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길고 '평화로운' 통치를 물려받은 지 겨우 1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튀토부르크 참사의 소식은 아프리카까지 전해졌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원주민 보조병이었다가 배신을 택한 게르만의 아르미니우스가 바루스와 그의 3개 군단을 섬멸한 사건은 타카리나스의 탈영 불과 6년 전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사실은 이렇습니다. 무술라미 동포들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독수리 깃발 아래에서 쌓은 실전 경험을 갖춘 전직 군인들로 구성된 강도 무리가 지역 내 로마의 이권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황무지에서 홀로 있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현지 지도자인 마우리족의 마지파(Mazippa)가 그와 합류했습니다. 이 부족 지도자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인적 친구이자 위성왕국의 섭정인 마우레타니아 괴뢰왕 유바 2세와 사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타카리나스가 로마식으로 보병을 조직하는 동안, 마지파는 강력한 기병 군단을 만들어 동료를 엄호하고 아프리카 프로콘술에게 골칫거리를 안겨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첫 번째 정면충돌: 카밀루스 (서기 17년)

문제의 총독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마지파의 반복적인 약탈에 질렸던 대지주들의 격분한 항의에 못 이겨, 서기 17년 봄 제3 아우구스타 군단과 보조 부대, 도합 약 1만 명을 동원해 반란 누미디아인과의 전투에 나섰습니다. 교전 결과는 로마의 승리였고, 타카리나스는 군단의 철벽 같은 중장보병에게 패배한 뒤 사막으로 도주했습니다. 카밀루스는 승리했지만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미뤄진 것에 불과했습니다.

카밀루스가 환호와 박수 속에 승전 축하를 하는 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리나스는 다시 전장에 나타나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땅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게릴라 전략을 이어갔습니다. 항의는 계속됐고, 18년의 차기 프로콘술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는 반군 진압 작전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기다 강의 굴욕과 십분형(十分刑)

타카리나스는 성공적인 히트앤런 공격을 여러 차례 감행한 뒤 자신감이 높아져 있었고,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의 1개 코호트가 요새화된 파기다(Pagyda) 강변 진영을 포위할 정도였습니다. 그 부대를 지휘하던 프리무스 필루스는 데크리우스(Decrius)라는 백인대장이었습니다. 타키투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로마 군단병이 탈영병과 부랑자 무리에게 포위당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여겼습니다. 데크리우스는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출격했으나, 누미디아인의 수적 우위 앞에 실패했습니다. 용감한 백인대장은 한쪽 눈에 화살을 맞고 신체 여러 곳에 상처를 입은 채로도 부하들에게 계속 전진하라고 외쳤지만, 병사들은 토착민의 맹렬함에 겁먹어 그를 홀로 죽게 방치한 채 요새 성벽 안으로 물러났습니다.

타카리나스는 아프로니우스와 증원군의 도착에 압박을 느껴 포위를 풀었지만, 요새를 해방한 프로콘술은 그 코호트의 굴욕적이고 비겁한 행태를 알게 되자 로마군에서 가장 가혹한 징계법인 십분형(decimation)을 명령했습니다. 열 명 중 한 명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둔기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반군 타카리나스(Tacfarinas)

북아프리카의 왕국들

탈라 전투와 전세의 반전

파기다 강의 경고는 로마군에게 냉혹한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은 타라(Thala, 튀니지 — 120년 전 또 다른 기억에 남는 누미디아인 유구르타가 패배했던 바로 그곳)에서 타카리나스와 교전하여, 다시금 정면 회전에서 토착 부족들을 격파했습니다. 이 패배는 타카리나스에게 정규전 방식으로는 로마 군단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는 그때까지 좋은 성과를 거두어온 게릴라 전략을 계속 고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해안으로 후퇴하던 중 프로콘술의 아들 L. 아프로니우스 카이사리우스가 지휘하는 분견대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탈출해 오레스 산맥(Montes Aurès)으로 피신했지만, 3년간의 약탈로 축적한 전리품을 모두 젊은 호민관에게 빼앗기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아버지 아프로니우스는 이 공적으로 원로원이 허한 개선식에서 그 전리품을 로마 거리에 과시했습니다. 다시 한번 문제는 부분적으로... 정말 부분적으로만 해결되었을 뿐입니다.

티베리우스를 분노시킨 협상 제안

그 개선식 직후, 타카리나스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 본인과 만나, 완전한 휴전을 조건으로 자신과 가족에게 속주 내 영토를 요구하겠다는 의사였습니다. 그 편지는 화평 제안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웠습니다. 타카리나스는 황제에게, 합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영원히 계속해 끝없는 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누미디아인의 제안은 진지한 것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정신 건강과 감정적 안정이 나이와 함께 크게 나빠지던 황제가 어떻게 말했는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조차 사절을 보내는 짓은 감히 하지 않았는데."

자기와 대등하게 국가 간 협약을 제안하는, 군단 출신의 악취나는 탈영병, 그에게는 그저 악명 높은 산적에 불과한 존재에 대해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그 미치광이를 한 번에 척살하기 위해 어떤 자원도 아끼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제안은 거부되었고, 황제는 원로원에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유능한 지휘관을 선임하라고 위임했습니다.

블라이수스의 삼면 포위 작전 (서기 22~23년)

선택된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섬뜩한' 우익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의 숙부,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였습니다. 판노니아 같은 불안한 속주 통치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습니다. 블라이수스는 아프리카에 주둔한 제3 아우구스타 군단에 더해, 다뉴브 변경에서 제9 히스파나 군단과 제15 코호르스 볼룬타리오룸을 함께 데려왔습니다. 두 군단, 1개 코호트와 보조 부대를 합쳐 블라이수스는 자신의 아프리카 원정에 거의 2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처분은 단순했습니다. 반란에서 이탈하는 자에 대한 무차별적 사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 바로 타카리나스였습니다. 전임자들보다 두 배의 병력을 가진 새 프로콘술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반군을 섬멸하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정면 결전을 추구하는 대신, 병력을 세 개 종대로 나누어 세 지점에서 누미디아 땅으로 진입하고, 상시 요새들을 촘촘히 세워 반군의 이동을 차단했습니다. 소모와 봉쇄의 전술은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22년에 새로운 교전이 벌어졌고, 타카리나스의 동생은 포로로 잡혔으며 대중적 이반 세력은 모래폭풍처럼 흩어졌습니다. 겨울 동안 병력을 철수시킨 블라이수스는 23년 봄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는 황제 가문이 아닌 인물에게 수여된 마지막 개선식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만족했지만, 문제는 또다시 미해결 상태로 남았습니다.

최후의 프로콘술 돌라벨라 (서기 24년)

24년의 새 프로콘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마주한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타카리나스는 여전히 속주 남쪽 한계까지 펼쳐진 광대한 변경 지역을 이반 군세의 보호 아래 활보하고 있었고, 약탈과 습격은 전혀 제재받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와 블라이수스는 낙관적이었고, 반군 지도자의 진정한 힘이 광대한 사막과 그 땅에 살갗처럼 질긴 주민들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진영에는 리비아, 누미디아, 아프리카 출신 피난민뿐 아니라 건조한 남방의 게툴리족과 가라만테족 — 오늘날 투아레그의 조상 격인 민족 집단 — 까지 합세했습니다. 심지어 유바 2세의 후계자인 젊고 친로마적인 왕 프톨레마이오스의 비굴함에 불만을 품은 마우리족들마저 누미디아 대의에 가담했습니다. 그들은 공격한 뒤 로마 주둔군이 반응하기도 전에 모래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코호트는 아직 낙타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무인지경인 리비아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무모한 프로콘술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모험이었습니다.

반란에 더 불을 지피기라도 하듯, 제9 히스파나 군단의 철수는 누미디아 선전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제국이 극북에서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느라 아프리카에서 병력을 빼내야 했다며, 누미디아를 로마의 멍에에서 해방할 때가 왔다고 선동한 것입니다.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사하라 사막의 반군 타카리나스(Tacfarinas)

누미디아인들

이 모든 상황은 타카리나스를 한층 고조시켰고, 그는 투부스쿰(Thubuscum, 현 알제리 캄미사)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돌라벨라의 신속한 개입이 포위를 해체했고,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의 규율 있는 보병 앞에서 토착민은 또다시 패배했습니다. 전임자들보다 능숙했던 프로콘술은 단순한 승리로는 결착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 반군 지도자의 생포를 목표로 직접 추격전에 나섰습니다. 누미디아인이 피신한 그의 영토를 다스리는 동맹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가 제공한 잘 먹이고 단련된 마우리 기병 4개 군단급 부대를 편성해 속주 남부의 골짜기를 하나하나 샅샅이 뒤졌습니다.

오제아의 피비린내 나는 새벽

현지 밀정이 프로콘술에게 타카리나스가 오제아(Auzea, 현 알제리 수르 엘고즐란)라는 곳의 폐허에 숨어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그 지역은 숲이 우거지고 기복이 있어, 소규모 분견대가 발견되지 않고 접근하기에 이상적이었습니다. 돌라벨라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밤새 조용히 대기하다가, 동이 트기 직전 아무것도 모르는 누미디아인들은 군단의 나팔소리와 함성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학살이었습니다. 효율적이면서도 무자비한 로마 보병은, 아직 반쯤 잠들어 있거나 반쯤 옷을 걸치지 못한 채 말에서 내려 무장도 제대로 못 한 반군들을 토끼 잡듯 학살했습니다. 제3 아우구스타 군단병들에게 자비는 없었습니다. 8년간의 고되었던 전쟁 동안 쌓인 원한이 그 피비린내 나는 새벽에 폭발한 것입니다. 프로콘술의 엄명에 따라 백인대장들은 병사들을 타카리나스 쪽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먼저 그의 호위대가 쓰러졌고, 이어 그의 아들이 쓰러졌으며, 마침내 홀로 몰린 그는 자신을 사로잡으려던 군단병들의 창끝에 스스로 몸을 던졌습니다.

누미디아 독립의 마지막 숨결

타카리나스의 죽음과 함께 무술라미 땅에서 독립의 마지막 숨결이 사라졌고, 그 지역은 반달족의 도래 때까지 아프리카 속주에 통합되어 남게 되었습니다. 누미디아 반군의 진정한 승자인 P.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원로원에 자신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그 제안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기각되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 부당한 결정 뒤에 세야누스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타카리나스를 상대로 한 개선식에 걸맞은 사람이 있다면 돌라벨라였지만, 그럴 경우 블라이수스에게, 더 나아가 티베리우스 본인에게도 수치가 되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