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로마 전제정(도미나투스)이란? 프린키파투스와의 비교로 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개혁

로마 전제정(도미나투스)이란? 프린키파투스와의 비교로 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개혁

프린키파투스의 한계와 도미나투스의 등장

군인황제 시대가 지나면서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를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로마 평화(Pax Romana)의 시대는 저물었고, 영토 곳곳에서 해적과 산적, 강도들이 들끓었으며 황제들은 원로원, 병사들, 그리고 근위대에 의해 하나둘 살해당했습니다.

바로 이런 혼란의 시대에 등장한 인물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상황을 두고 볼 때 전통적인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국가원수'라는 지위에서 '전제군주'로의 대전환을 단행했습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대표에서 전제군주로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실질적으로는 황제 통치였지만, 형식상으로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황제 역시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시민이라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체제의 토대는 카라칼라 황제 때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가 반포한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속주의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프린키파투스를 떠받치던 구조 자체가 완전히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역사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해 보면, 카라칼라는 네로나 콤모두스보다 더 심각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화폐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고 악화(惡貨)를 유통시킨 죄가 무겁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은 함량을 낮춘 은화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제국 경제는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했을 때, 그 앞에는 감당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는 눈앞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한 개혁 의지를 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로원을 존중하고 배려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자 로마 시민들은 신하(臣下)가 되었고, 황제는 주인(Dominus, 도미누스)이 되어 절대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세제 개혁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로마 시민권자: 병역 의무(자원 입대 가능), 소비세·판매세는 가격의 1%, 상속세 5%, 노예 해방 시 노예 시가의 5%를 내는 해방세
  • 시민권이 없는 속주민: 소득의 10%를 내는 속주세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제정(도미나투스) 체제로 바뀌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국가가 필요한 만큼을 수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일본의 세제와 비슷하다고 하면, 그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방세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단일한 국세로 통합되었으며, 세금은 지세(地稅)와 인두세로 나뉘어 황제가 임명한 관료들이 징수했습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중앙집권화였던 것입니다.

정치 제도 개혁

원로원은 형식적으로는 남아 있었지만, 원로원파의 존중을 받던 예전과 달리 전차경기 개시 신호를 담당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위축되어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프린키파투스 이전부터 명맥만 유지하던 공화정은 완전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속주(provincia)라는 개념 또한 없애버렸습니다.

로마 전제정(도미나투스)이란? 프린키파투스와의 비교로 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개혁

모든 영토가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두 명의 황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부황제(카이사르)가 다스리는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 체제가 되었으며, 행정은 황제가 직접 임명한 관료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로마 전제정(도미나투스)이란? 프린키파투스와의 비교로 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개혁

황제가 넷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중심의 전제정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롭게도 프린키파투스는 오늘날 미국 정치와, 도미나투스는 오늘날 일본 정치와 많은 유사점을 지닙니다.

경제 정책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화폐의 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은화의 은 함량을 5%에서 100%로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원래 은화의 은 함량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100%였지만, 군인황제 시대에는 5%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100%로 만들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한번 시장에서 사라진 양화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최고의 사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다릅니다. 새 은화를 손에 넣은 사람들은 좀체 놓아주지 않았고, 유통량도 부족하여 결국 기존의 악화가 계속 유통되었습니다.

오히려 사태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계 최초로 통제경제를 실시한 황제로도 유명합니다.

물가와 서비스 가격을 통제했지만, 2차 대전 직후처럼 암시장이 성행한 이 시대에도 암시장이 판을 쳤고, 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물물교환이 성행하는 등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기독교 탄압

훗날 동로마(비잔틴) 제국에서 교황권 관련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시대에는 '황제 = 신'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주신(主神) 유피테르와 동일시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여기에 맞선 것이 바로 기독교도들이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오직 신 야훼(YHVH)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나머지 신들은 모두 신을 사칭하는 악신으로 여겼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도들을 탄압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본인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데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록은 주로 기독교도들에 의해 남겨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탄압이라고 해서 네로처럼 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파괴되고,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모든 성경과 십자가가 불태워졌고, 로마법의 보호를 잃었으며, 공직에서 축출되고 재산이 몰수되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물론 상당히 가혹한 조치들이지만, 훗날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에게 가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미나투스는 성공이었는가?

내정 면에서 보면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 혼란은 통제 불능에 빠졌고 개혁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미나투스를 곧바로 실패작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시대에 로마 영토는 외세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았습니다.

게르만족 역시 로마 방어선(리메스)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외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네 황제가 다스리는 테트라르키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러난 직후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다시 한 황제의 절대 전제로 회귀했습니다.

로마는 그 후 150년간 더 존속했고, 동로마(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전제정 체제가 아니었다면 로마는 4세기에 이미 멸망했을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성과를 거둔 셈입니다.

도미나투스는 공화정의 숨통을 완전히 끊었고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기 때문에, 기독교 중심의 역사관에서는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 없이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과감한 개혁이 단행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