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 하면 흔히 사무라이부터 떠올리기 쉽습니다. 유명한 카타나, 그림 같은 성, 땋은 비단 갑옷, 긴 옻칠 활, 끊임없는 내전 속에서 전사 귀족 계급인 사무라이는 거의 천 년 동안 섬나라 일본의 운명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무라이가 피와 불로 역사의 장에 등장하기 전, 즉 1000년 무렵—중세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일본에는 펜, 정확히는 붓이 칼보다 강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헤이안 시대입니다. 고전 일본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이 시기는 수백 년간 나라를 어둠에 빠뜨린 내전 직전의 찬란한 막간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의 집단적 잠재의식 속에 문명의 정점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 평화롭고 우아한 '아르카디아'는 일본 문자와 문학의 황금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세련되고 찬란한 시대에 일본 문학 최고의 천재는 여성이었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방대한 문인·시인 군세 가운데 가장 밝게 빛나는 이름은 바로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 두 여성 작가였습니다. 재능 있는 작가들이 교토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배출되던 시대에 단 한 사람을 꼽기란 쉽지 않지만, 이 두 신동은 시대를 뛰어넘는 광채로 후대의 모든 시인들을 능가했습니다. 그들의 문학적 천재성은 당시 일본이 둘을 함께 담기에도 좁을 정도였고, 필연적으로 전문가로서의 질투와 궁중 음모 속에서 충돌했습니다. 일본이 세계 문단에 바친 가장 위대한 작가들이자, 동시에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셈입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000년 무렵 일본 황실은 그 정점에 있었고, 교토의 예술은 인근 요시노산의 벚꽃보다 더 화려하게 피어났습니다. 이 찬란한 시대의 이름이 된 헤이안(平安)은 '평화와 고요'라는 뜻으로, 새롭게 건설된 제국의 수도 교토의 옛 이름입니다. 헤이안 시대는 지난 세기 동안 받아들인 중국의 영향을 소화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운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습니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 세련된 세계, 시를 사랑하는 교양 있는 귀족들이 다스리는 호화로운 황실에서는 시를 짓는 능력이 곧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詩)의 세계는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모든 여성이 글을 썼던 것은 아니며, 아름다움을 글로 빛내는 데 헌신한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애초에 벚나무 그늘에 앉아 시를 읊을 여유가 있었던 것은 극소수의 귀족들뿐이었고, 인구의 대다수는 문맹 상태로 들판에서 매일 육체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여유로운 귀족들 사이에서 시는 매우 높이 평가되는 오락이었으며, 여성이 남성 동료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이 취미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미묘한 형태의 차별은 존재했습니다. 유럽의 문화어가 라틴어였던 것처럼 헤이안 일본의 공용 문어는 고전 중국어였습니다. 중요한 법률과 조약은 소수의 학자만 유창하게 다룰 수 있었던 어렵고 복잡한 한자로 작성되었고, 이 때문에 한문은 사실상 '남성의 글'이 되었습니다. 반면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던 시와 친밀한 일기 같은 '소소한 예술'에는 일본어가 사용되었고, 그 기반이 된 음절 문자는 때때로 '여성 문자'라고 불렸습니다. 이 문자는 더 단순하고 간결했지만 획이 더 우아하고 서정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서예의 아름다움 때문에 남녀 모두 시와 일기를 쓸 때 이 '여성 문자'를 선호하게 된지도 모릅니다. 수세기에 걸쳐 음(陰), 즉 여성의 아름다움이 양(陽), 남성의 영역을 누르면서, 처음에는 하찮게 여겨졌던 이 문자는 마침내 오늘날 일본어 표기의 기둥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문단에는 나름의 자유와 평등이 풍토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황후를 곁에서 모시던 우리의 주인공 두 사람은 이런 분위기를 십분 활용해 세계 문학사에 금빛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은 본명이 아니라, 궁중에서 불리며 후손에게 전해진 별명입니다.
이는 독특한 사례가 아닙니다. 당시 일본, 특히 궁중에서는 여성이 본명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예법이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은 대개 아버지나 남편이 궁정에서 맡은 관직을 따서 불렸고, 여기에 색 이름을 덧붙여 별명을 완성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라사키 시키부는 '의식(式部)을 관장하던 관직에 딸린 보라색(紫) 아가씨'를 뜻하게 되었고, 세이 쇼나곤은 '차관급 관직(少納言)을 지낸 기요하라의 딸'이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리는 일본 문학 최고의 천재 두 사람을 남성 친척을 가리키는 별명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일본의 성 인식이 어땠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헤이안의 여성들은 그 이후 몇 세기 동안의 일본 여성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상당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낭만적인 사랑 역시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교토 궁정에서는 혼외정사가 일상이었고, 연인들의 은밀한 만남은 복잡하고 세련된 의례를 거쳤으며, 연애는 하나의 예술, 선비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혼자가 두셋 없으면 수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그리고 그것은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생활과 궁중 음모 너머에서, 당시 여성들은 예술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10~11세기의 일본은 헌신적인 궁중 여인 두 명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역사는 두 명의 탁월한 기록가를 얻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고전 일본, 그 행복했던 황금기의 삶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생생한 목격의 기록을 글로 남긴 이들은 이들 두 사람 외에 없으니까요.
계속됩니다… 다음 이야기: 고대 일본판 공고와 케베도, 무라사키와 세이(여성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