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통일로: 1037~1252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역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알폰소 7세의 즉위와 황제 칭호
알폰소 7세는 1126년 어머니 우라카 여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치세 초기는 어머니의 전 남편이자 아라곤의 왕 알폰소 1세 '전사왕'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두 군주 간의 분쟁 중 하나는 임페라토르 토티우스 히스파니아에(Imperator Totius Hispaniae, 전 히스파니아의 황제)라는 칭호(명예적인 성격이 강했으나)를 둘러싼 것이었다. 이 칭호는 옛 서고트 왕국의 계승자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아라곤 측이 이 칭호를 1134년 알폰소 1세 사망 때까지 사용하자, 레온 측은 1135년 5월 26일 레온에서 알폰소 7세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영토 분배와 종속 왕국의 설치
알폰소 7세는 광활한 영토 중 레온 왕국만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영토는 자신을 종주로 모시는 친족과 자녀들에게 왕의 칭호를 허락하며 위임했다. 1143년 사촌 알폰소 엔히케스(포르투갈), 1150년 서녀 우라카(아스투리아스), 그리고 아들들인 산초와 페르난도에게 1148년 이미 산토도밍고 데 실로스 문서에서 '왕'으로 칭하게 했으나 구체적 영토는 배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황제 알폰소 7세의 권위 아래 있었다.
1149년부터 산초는 나헤라의 왕으로 행세하며 라 리오하, 소리아, 카스티야, 바야돌리드, 카리온, 살다냐의 땅을 받았다. 동생 페르난도 역시 갈리시아 왕으로 등장한다. 이는 알폰소 7세가 이미 두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할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구상은 1157년 8월 21일 황제가 사망하면서 실행되었다. 루카스 데 투이(Lucas de Tuy)의 기록에 따르면, "전사적인 카스티야를 산초에게, 충성스러운 레온과 갈리시아를 페르난도에게 주었다."
두 왕국의 분할과 제국의 꿈의 포기
- 산초 3세(카스티야): 아빌라, 세고비아, 트라시에라, 티에라 데 캄포스(사아군까지),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야나, 톨레도 왕국 등 카스티야 전역.
- 페르난도 2세(레온): 레온, 갈리시아, 포르투갈, 토로, 사모라, 그리고 누이 우라카가 다스리던 아스투리아스.
국경은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Rodrigo Jiménez de Rada)에 따르면 '칼사다 데 라 플라타(은의 가도), 일명 기니아(Guinea)' 길로 정해졌다. 톨레도가 산초의 몫으로 넘어간 것은, 페르난 곤살레스 시대의 카스티야 백작령(레온으로부터 독립한 적 없음)보다 훨씬 확대된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적·군사적 우위(특히 이슬람 지배지역으로의 팽창)를 인정한 결과였다. 이 분할은 알폰소 7세가 평생 추구하던 제국 재건의 꿈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아군 조약과 산초 3세의 급사
부왕 사후 약 1년 뒤인 1158년, 산초 3세는 동생 페르난도 2세와 사아군 조약을 맺었다. 양측은 자손 없이 사망할 경우 서로를 상속자로 인정하고, 반란을 일으킨 포르투갈을 복속시켜 분할하며, 이슬람 영토 정복 구역을 획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158년 7월 31일, 부왕 사망 1년 만에 산초 3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의 전력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왕비 블랑카 데 나바라가 1156년 사망했고, 슬하에 겨우 두 살 반 된 아들 알폰소 8세만 남았다. 산초는 임종 시 카스트로 가문의 구티에르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를 섭정과 왕자 교육 담당으로 임명하고, 왕자가 15세가 될 때까지 주요 영주들의 영지를 보장해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섭정 다툼: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
구티에르는 곧 섭정직과 왕자 양육권을 강력한 라라 가문의 수장 만리케 데 라라에게 양도했다(요청 시 반환 조건). 만리케는 직접 섭정을 맡고 왕자 양육은 이복동생 가르시아 데 아사에게 맡겼다.
1160년, 구티에르는 라라 가문의 전횡이라 판단해 왕자 양육권과 섭정직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만리케가 알폰소 8세를 직접 양육하게 되자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 간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라라 가문이 카스티야 내부를 장악하는 동안, 카스트로 가문(페르난도와 알바로)은 레온 왕이자 왕자의 삼촌인 페르난도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페르난도 2세의 개입과 발무사 전투
1162년 살라망카가 페르난도 2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만리케 데 라라 휘하 아빌라 민병대가 이를 지원했다. 페르난도 2세는 양측을 1162년 6월 발무사 전투(Battle of Valmuza)에서 격파했다. 이후 카스트로 가문 인사들을 대동하고 카스티야로 진입해 세고비아, 톨레도 등지를 점령했다. 만리케는 알폰소 8세를 데리고 소리아로 퇴각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만리케는 페르난도 2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2세는 알폰소 8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권을 얻었으나, 아이는 여전히 소리아에서 만리케의 보호 아래 있었다. 페르난도 2세가 소리아로 가서 알폰소 8세의 충성 맹세를 요구하자, 라라 가문은 아이를 산 에스테반 데 고르마스를 거쳐 아티엔사로 피신시켰다. 누뇨 데 라라는 레온 왕에게 아이를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합의 이행을 거부했다. 페르난도 2세는 배신이라 비난하며 만리케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나, 만리케는 "카스티야 왕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의무"라며 응하지 않았다. 페르난도 2세는 일단 레온으로 돌아갔으나, 카스트로 가문의 페르난도 데 카스트로를 통해 카스티야 일부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라라 가문의 승리와 알폰소 8세의 친정
만리케 데 라라는 레온의 영향력을 떨쳐내려 우에테(Uclés) 공략에 나섰으나, 페르난도 데 카스트로의 군대에 패해 전사했다. 라라 가문의 수장과 섭정직은 동생 누뇨 데 라라가 승계했고, 알폰소 8세를 아빌라에 두었다. 누뇨의 섭정기는 카스트로 가문과의 반복적인 충돌과 화해로 점철되었으며, 페르난도 2세는 한동안 카스티야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듯 보였다.
1166년 알폰소 8세를 대동하고 톨레도를 탈환한 뒤 누뇨 데 라라의 권세는 한층 강화되었고, 페르난도 데 카스트로의 세력은 쇠퇴했다. 이후 누뇨는 제자 알폰소 8세의 신임을 얻어, 1169년 초 왕이 직접 수리타(Zurita)에 갇힌 스승을 구출하러 나설 정도로 관계가 돈독해졌다.
부왕 산초 3세의 유언에 따라 14세(1169년)가 되면 친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알폰소 8세는 성년이 된 후에도 누뇨 데 라라를 수상으로 기용하다가 117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측근으로 두었다.
알폰소 8세, 카스티야 최장수 군주가 되다
알폰소 8세는 두 살에 왕위를 물려받아 겪은 복잡한 정국을 극복하고, 1169년 11월 11일 부르고스에서 정식으로 친정을 선포하며 왕권을 확립했다. 그는 이후 56년간 카스티야 왕관을 쓴 최장수 군주가 되었으며, 알라르코스(Alarcos)의 패배와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의 대승 등 이슬람 세력과의 결정적 전투를 치렀다. 아내 레오노르 플란타헤네트와 함께 우엘가스 수도원(Monasterio de Las Huelgas)을 창건하고, 훗날 카스티야와 레온 왕관의 재통합 기반을 닦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Wikimedia Commons)
참고 문헌: 다니엘 페르난데스 데 리스(Daniel Fernández de Lis), 『전쟁에서 통일로(From war to unification)』; 곤살로 마르티네스 디에스(Gonzalo Martínez Díez), 『알폰소 8세, 카스티야와 톨레도의 왕(1158-1214)(Alfonso VIII, rey de Castilla y Tole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