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 그의 두 아들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가 차례로 계승했다. 헨리 1세에게는 아들 윌리엄과 딸 마틸다라는 두 자녀가 있었다. 왕위 계승은 아들 윌리엄을 통해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듯했으나, 1120년 11월 25일 '백색의 배(White Ship)' 침몰 사고로 왕세자 윌리엄이 익사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계승 위기와 마틸다의 지위
헨리 1세는 적법한 후계자로 딸 마틸다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과부에다 자녀도 없었으며, 앵글로-노르만 왕조에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 전례가 없었다. 당시 국왕이 전장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에, 마틸다가 여왕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헨리 1세가 1128년, 1131년, 1133년 세 차례나 신하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게 한 것 자체가 그가 이 계승이 순탄치 않으리란 점을 직감했음을 보여준다.
황후에서 왕위 계승자로
마틸다는 처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정략결혼하여 '황후' 칭호를 얻었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자 그녀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동생 윌리엄이 죽자 헨리 1세는 그녀를 앙주의 제프리와 재혼시켰다. 이는 노르만디 남부 국경에 위치한 앙주 공국을 통해 프랑스와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정치적 수완이었다. 두 사람은 1128년 6월 17일 르망에서 결혼했고, 1133년 3월 5일 장남 앙리(훗날 헨리 2세)가 탄생했다.
스티븐의 찬탈과 내전의 시작
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주요 귀족들은 마틸다에게 맹세한 충성 서약을 파기했다. 일부는 마틸다가 외국 왕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서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가장 먼저 서약을 어긴 이는 죽은 왕의 조카이자 마틸다의 사촌인 블루아의 스티븐이었다. 그는 헨리 1세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불로뉴쉬르메르에서 런던으로 달려가 왕위를 선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을 받으며 왕권을 장악했다. 스티븐은 부유하고 예의 바르며 귀족과 성직자(형 헨리는 윈체스터 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40대 초반의 유력한 후보였다. 무엇보다 권력 공백을 틈타 신속하게 행동한 것이 주효했다.
마틸다의 반격과 옥스퍼드 포위
하지만 마틸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첫 남편 부재 시 제국의 섭정을 맡아 통치력을 입증한 바 있었고, 둘째 남편 제프리 드 앙주는 호전적이고 강인한 가문 출신으로 훗날 플랜태저넷 왕가의 기질이 될 성격의 소유자였다. 마틸다는 노르만디에서는 남편 제프리의 군사 작전으로, 잉글랜드에서는 스티븐의 실정으로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복동생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 스티븐의 형이자 윈체스터 주교인 헨리, 솔즈베리 주교 로저 등—을 규합해 세력을 확장했다.
1139년 마틸다는 로마 교황청에 정통성을 호소하고, 글로스터 백작의 지원으로 잉글랜드에 상륙해 브리스톨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로써 '아나키(Anarchy)'라 불리는 잔혹한 내전이 시작되었다. 마틸다는 서부를, 스티븐은 남동부를 장악했고, 중부와 북부는 봉건 영주들의 수중으로 넘어가 약탈과 폭력이 난무했다.
1141년: 전세의 역전과 놓친 기회
1141년 링컨 전투에서 글로스터 백작이 이끄는 마틸다 군이 스티븐 왕을 포로로 잡으며 전세가 기울었다. 런던에서 마틸다의 대관식이 준비되었으나, 스티븐의 아내 마틸다 드 불로뉴가 이끄는 잔존 세력의 저항과 귀족·성직자들의 지지 이탈로 무산되었다. 런던 시민들이 마틸다에게 재정 지원을 요구하자 격분한 군중이 웨스트민스터로 몰려들었고, 마틸다는 황급히 옥스퍼드로 도주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윈체스터 주교를 제압하려 보낸 원정대가 패배해 글로스터 백작마저 포로로 잡혔다. 마틸다는 글로스터 백작과 스티븐 왕을 맞교환할 수밖에 없었고,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1142년 겨울, 옥스퍼드 성에서의 기적 같은 탈출
1142년, 스티븐이 옥스퍼드 성에 틀어박힌 마틸다를 포위하며 전세는 다시 급변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마틸다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 흰 망토를 걸치고 기사 서너 명만 대동한 채 포위망을 뚫고 성을 빠져나간 것이다. 약 16km(10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해 애빙던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아군과 합류해 목숨을 건졌다. 당대 역사가 윌리엄 오브 맘즈버리는 이 일을 '신의 기적'이라 기록했다.
아나키의 종식과 플랜태저넷 왕조의 태동
이후에도 명확한 승자 없는 내전은 계속되었고, 최대 피해자는 잉글랜드 백성들이었다. 양군 간의 교전과 치안 부재를 틈탄 무법자들의 약탈·강간·살인이 횡행했고,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까지 북부를 침공해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 시기를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잠들었을 때(When Christ and His Saints Slept)"라 표현하며, 신마저 떠난 땅의 비참함을 증언했다.
교착 상태는 1148년 마틸다가 노르만디(남편 제프리가 정복해둔)로 건너가며 해소되었다. 이는 포기 선언이 아니었다. 열여섯 살에 가까워진 아들 앙리에게 왕위 쟁탈의 몫을 넘긴 것이었다. 젊고 패기 넘친 그는 곧 잉글랜드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게 된다. 그 이야기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탄생' 편에서 이어진다.
참고 자료 및 추천 도서
- 피터 애크로이드, "The History of England. Volume I: Foundation"
- 로이 스트롱, "The Story of Britain"
- 사이먼 샤마, "A History of Britain" (BBC 제작)
- 데이비드 스타키, "Monarchy"
-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She Wolves" (잉글랜드의 여왕들)
- 켄 폴렛, "The Pillars of the Earth" (백색의 배 침몰과 마틸다가 주요 소재로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