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32주의 기나긴 항쟁 — 1896년 라우터베르크 의자 노동자 파업의 전말

착취와 임금 삭감은 19세기 말 유럽 곳곳에서 흔히 목격되던 현실이었습니다. 1896년 3월 2일, 독일 하르츠 지방의 소도시 라우터베르크에서 의자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로써 당시 기록상 가장 긴 32주간의 격렬한 노동쟁의 막이 오릅니다.

글: 아이린 알텐뮐러(Irene Altenmüller)

19세기 후반 하르츠 산맥의 라우터베르크(Lauterberg im Harz). 수백 년 동안 이 마을을 지탱해 온 광산업은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고, 그 빈자리를 가구 제조업이 차지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9개의 의자 공장이 들어서 최대 1,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가정에서 의자 직공으로 일하는 여성·노인·아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근로자의 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 엽서에 담긴 라우터베르크의 모습. 1915년까지 이 마을은 목제 가구 생산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공장의 노동 조건은 극히 열악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씩 주 6일을 일해야 했고, 휴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작업장 조명에 쓸 도구와 등유는 노동자가 직접 준비해야 했고, 작업 자재 중 일부는 공장 주인에게 정가보다 비싼 값에 구매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급된 임금의 상당 부분이 다시 기업가의 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 일상을 지배했다

자재값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던 많은 노동자들은 빚에 몰려 의존의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의자 판매가가 흔들릴 때마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임금을 깎았습니다. 이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작가이자 정치인 클라우스 베티그(Klaus Wettig)는 “단시간 근무와 임금 삭감이 공장의 분위기를 지배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노동조합은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 폐지 이후에야 겨우 합법화되었고, 조합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에 시달렸습니다. 베티그는 “조합원 신분이 알려지면 곧바로 해고당했다”고 전합니다.

추가 임금 삭감 시도, 더는 참을 수 없는 한계

1896년 3월, 의자 제조업체 할텐호프&치델러(Haltenhoff & Zeideler)는 또다시 임금 삭감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라우터베르크에서 의자 공장을 운영하던 하인리히 힐게이스트(Heinrich Hillegeist)는 회고록에서 “의자 제조업자들은 가격에 맞는 의자를 만들 생각도 없었고, 만들 수도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결국 3월 2일,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1893년에 설립된 목공협회(목공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프리츠 에르푸르트, 파업의 지휘봉을 잡다

파업을 이끈 사람은 프리츠 에르푸르트(Fritz Erfurth)였습니다. 그는 목공 직공이 아니라 담배 제조업자였으며, 얼마 전에야 라우터베르크에 정착한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조합원 모집을 위해 목공노조가 이 지역에 파견한 조직가였는데, 이는 당시 노조가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흔히 사용하던 방식이었습니다. 힐게이스트의 회상에 따르면 에르푸르트는 짧은 시간 안에 약 700명의 조합원을 규합했습니다. “할텐호프&치델러에서 거둔 성공은 그에게 화려한 성과를 안겨주었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제조업체들, 카르텔로 맞서다

[1896년, 하인리히 힐게이스트는 라우터베르크의 의자 공장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당시 사건들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에르푸르트는 이내 기업가들에게 ‘사회주의 악마’로 낙인찍혔습니다. 기업가들은 연합해 카르텔을 결성하고, “어느 한 회사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나머지 회사들은 전 직원을 직장 폐쇄하거나, 그러지 않을 경우 각각 3,000마르크의 벌금을 지불한다”(제조업체 간 계약 내용, 편집자 주)는 조항에 합의했습니다.

파업 파괴자들과의 폭력적인 충돌

양측은 총력전을 벌였습니다. 기업가들이 해외에서 파업 파괴자(대체 노동자)를 고용해 들여오면서 충돌이 잦아졌고, 심지어 총성이 울리기도 했습니다. 칼에 찔려 다치는 사람이 여럿 발생했고, 파업 파괴자 한 명이 불에 타 죽는 비극까지 일어났습니다.

강제 실직 속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노동자들

그러나 직장 폐쇄는 노동자들에게 의외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그들은 이 시간을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1896년 6월 21일자 노동조합 기관지 ‘데어 홀차바이터(Der Holzarbeiter)’는 “노동자들이 사회·정치적 문제를 생각할 여유를 갖게 되었고, 대규모 주간 집회가 훌륭한 방식으로 교육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도 집회에 참여했고, 종종 연사로 나섰습니다. 다만 당시 여성은 정당이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는데, 그 길이 열린 것은 190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사민당 언론, 제국 전역에 기부 호소

장기화된 파업은 목공노조의 금고를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역사가 짧은 젊은 노조는 자원이 부족했고, 기업가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노조는 파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조합원에게 추가 기부금을 걷어야 했고, 사민당 역시 제국 전역의 언론 매체를 통해 라우터베르크 노동쟁의에 대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1896년 10월 13일, 재앙으로 끝난 파업

[1906년 사진 속 힐게이스트 공장의 라우터베르크 의자 노동자들. 남성들은 네덜란드로 수출될 극장용 의자 앞에 서 있다.]

몇 달간의 파업 끝에 목공협회는 재정 파탄 직전에 몰렸습니다. 협회는 제조업체들과 협상하기 위해 비밀리에 협상단을 라우터베르크에 파견합니다. 힐게이스트는 회고록에서 “그들은 우리가 제시한 조건대로 사람들을 다시 고용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적었습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파업 참가자들은 해고된 뒤 재고용되었지만, 그 전에 노동조합 탈퇴에 동의해야만 했습니다. 임금 인상은커녕 아무런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업가들은 최소한 앞으로 목공협회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파업 지도자는 라우터베르크를 떠나야 했다

파업 지도자 프리츠 에르푸르트는 기업가들의 압력에 못 이겨 가족과 함께 14일 안에 하르츠 산맥을 떠나야 했습니다. 32주가 지난 1896년 10월 13일, 역사상 가장 길고 극적인 파업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쟁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파업이 남긴 냉철한 결과

라우터베르크의 경험은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조직 규정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이후로는 본부의 승인 없이는 지역 단위 파업을 계획하거나 착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자 노동자들의 처우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제조업체들의 임금 삭감도 계속되었습니다. 새 세기가 열리고 나서야 상황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독일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노동조합으로 성장한 목공협회는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을 담은 단체협약 체결에 성공합니다.


2021년 3월 3일 오전 11:08

편집자 주: 이 글의 이전 버전에서는 파업 종료일을 1986년으로, 파업 기간을 23주로 잘못 표기했습니다. 실제로는 의자 노동자들의 파업이 약 32주 만인 1896년 10월 13일에 종료되었습니다. 숫자 오기에 대해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