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카라이스카키스의 첫 대승, 아기오스 블라시오스 전투(1823): 오스만군 상대 첫 진지한 전투이자 승리

카라이스카키스의 첫 대승, 아기오스 블라시오스 전투(1823): 오스만군 상대 첫 진지한 전투이자 승리

포위전의 종언과 오스만군의 보급 위기

1822년 12월 31일(일부 기록에서는 1823년 1월 초로 기록), 오메르 브리오니스(Omer Vrioni)와 키우타히스(Kioutachis) 두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그동안 벌여온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메솔론기(Missolonghi)에 대한 포위를 마침내 풀고 철수했습니다. 오스만군은 이후 아그리니오(Agrinio, 당시 명칭 브라호리/Vrahori) 방면으로 이동했지만, 심각한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기로 인해 아켈로오스(Acheloos) 강이 범람해 있어 강을 건너는 일 또한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장비와 수송 물자를 실은 채로는 강을 건널 수 없었기에, 오스만군은 투르크알바니아인(Turkalvan) 지휘관 아고스 바시아리스(Agos Vassiaris)와 이스마일 하치벤도(Ismail Hatzibendo) 휘하의 병력 3,000명을 분견대로 파견했습니다. 분견대의 임무는 프레베자(Preveza)로 이동해 오스만 본대에 공급할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카라이스카키스의 매복 결단

이 소식을 접한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스카키스(Georgios Karaiskakis)는 분견대를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병력 800명과 함께 에톨로아카르나니아(Etoloakarnania) 지방의 아기오스 블라시오스(Agios Vlasios) 협곡, 즉 알로니아 코로밀리아스(Alonia Koromilias) 또는 소볼라코스(Sovolakos)라 불리는 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때까지 카라이스카키스는 아그라파(Agrafa) 지방의 무장민병대장(아르마톨로스)으로서 대체로 관망하는 태세를 유지하며 오스만군에 대해 제한적인 활동만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1823년 1월 15일 또는 17일, 카라이스카키스와 그의 부하는 능선에 진지를 잡았습니다. 그 자신은 약 300명과 함께 그리스 진영의 중앙에 위치했습니다. 오스만군 부대가 도착하자 길을 비켜줄 것을 요구했지만, 카라이스카키스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연기하며 자신들을 오스만 본군에서 이탈한 탈영병으로 여긴다고 둘러댔고, 아그라파 지방 민병대와는 '튀르크족이 이 통행로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 안토니오에게 드리는 기도

전투에 참여한 자카리아스 스투르나라스(Zacharias Stournaras)의 증언에 따르면 전투는 1월 17일에 벌어졌으며, 교전 직전 카라이스카키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기도하고, 내일 축일인 성 안토니오(Saint Anthony)에게 촛불 하나를 바쳐 우리의 승리를 도와달라고 빌자. 자, 모두 십자 성호를 긋고,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회유 거부와 결투

하치벤도는 그리스군의 태세를 확인한 뒤 카라이스카키스에게 수만 그로시(grosi)를 제안해 매수하려 했습니다. 카라이스카키스가 거부하자 오스만군은 진격했습니다. 카라이스카키스는 부하들에게 오스만 장교부터 먼저 겨누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치벤도는 카라이스카키스에게 결투를 청했습니다. 튀르크 지휘관이 먼저 총을 쏘았지만 빗나갔고, 카라이스카키스는 그를 한 발에 쓰러뜨렸습니다. 다른 기록에서는 이 오스만 지휘관을 죽인 사람이 스투르나라스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 죽자"

카소물리스(Kasomoulis)의 기록에 따르면, 지휘관을 잃은 오스만군은 분노하여 맹공을 퍼부었고, 그리스 진영의 좌우 양익은 후퇴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중앙에는 오직 카라이스카키스만이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 죽자!"라고 외치며 그는 적들에게 거침없는 사격을 계속 퍼부었습니다. 지휘관이 흔들림 없이 버티는 모습을 본 후퇴하던 그리스 병사들은 다시 반전하여 광기 어린 기세로 오스만군을 공격했습니다.

압도적 승리

오스만군은 그리스군의 역습("요루시", yürüş)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튀르크족과 투르크알바니아인 200명 이상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사기가 완전히 꺾인 채 아그리니오로 패주했습니다. 그리스군은 카라이스카키스의 최측근 부관 바코얀니스(Bakoyannis)를 포함해 20명이 전사했습니다. 스투르나라스는 그리스군 전사 7명, 추격 과정에서 실종 6명, 부상 23명으로 기록하며, 오스만군의 손실은 300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아켈로오스 강의 참극과 전투의 의의

전투 후 오메르 브리오니스와 키우타히스의 본대는 결국 아켈로오스 강을 강행 도하해야 했고, 그 결과 500명 이상이 익사하고 많은 수송 물자를 잃었습니다. 두 파샤 군대가 건넌 강의 통로는 고고스 바콜라스(Gogos Bakolas) 대장이 안내해 주었습니다. 오스만군은 2월 8일에야 암필로키아(Amfilochia, 당시 명칭 카르바사라/Karvasara)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프레베자로 건너갔습니다.

이 전투는 사실상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스카키스가 1821년 그리스 혁명에서 거둔 첫 번째 정식 전투이자 승리였습니다. 튀르크·알바니아 병력 700여 명이라는 적의 막대한 손실만으로도 큰 성과였지만, 그리스에 더 값진 수확은 따로 있었습니다. 뛰어난 전사이자 전략적 재목을 얻은 것입니다. 다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의 재능은 당장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카라이스카키스의 첫 대승, 아기오스 블라시오스 전투(1823): 오스만군 상대 첫 진지한 전투이자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