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제국의 역사는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국 초기를 장식한 것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입니다.
이 이름은 로마 황제의 자리를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물려받아 이어갔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의 시대는 때때로 세베루스 왕조라고 불립니다.
이번에 소개할 마크리누스는 황제 카라칼라가 암살당하면서 세베루스 왕조가 끊긴 직후 등장한 황제입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눈 깜짝할 새에 종언을 고하고 맙니다.
단 1년을 다스린 황제
카라칼라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 도중에 암살당했습니다. 향년 29세였습니다. 그의 어머니이자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 역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계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결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파르티아는 카라칼라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로마 영토 침공에 나섰습니다.
급해진 로마 진영은 마크리누스를 차기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다만 '선택되었다기보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카라칼라를 암살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카라칼라를 암살한 것은 근위대였고, 마크리누스는 바로 그 근위대의 실질적 수장인 근위대장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황제는 적국의 손보다 근위대나 원로원에 의해 살해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마크리누스는 겉으로는 카라칼라가 병사했다고 발표했고, 심지어 그를 신격화하는 결의안까지 통과시켰습니다. 평생 폭정을 일삼았던 카라칼라가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죠. 기록 말살형을 선고받은 다른 폭군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우였습니다.
마크리누스 본인은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무어족 계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최초의 무어 출신 황제이자, 원로원 의원이 아닌 신분으로 즉위한 최초의 황제(53세)였습니다.
즉, 세베루스 이후 이어지는 이른바 군인 황제 중 한 명이었던 것입니다.
마크리누스의 즉위에 원로원의 반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이 무렵 원로원이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줍니다.
군부가 국가를 통째로 장악한 구 일본 제국의 구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크리누스는 겉으로는 원로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공식 호칭은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아우구스투스'라는 긴 이름이 되었습니다.
파르티아에게 빼앗긴 영토
마크리누스에게는 뚜렷한 군사적 공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세베루스 황제가 상당한 대가를 치르며 필사적으로 얻어낸 영토였습니다.

마크리누스는 당분간 파르티아와 교전을 이어갔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파르티아가 우세했고, 두 번째 전투는 로마가 우세했지만, 세 번째 전투는 벌어지지 못한 채 강화가 성립되었습니다.
강화 조건은 로마군의 메소포타미아 철수였습니다.
이에 로마 시민과 원로원, 그리고 병사들 모두 분노했습니다.
로마는 승리나 무승부가 아닌 강화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에서 순수한 로마 시민이라 부르기 어려운 마크리누스는, 이러한 전통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의 배반과 황제의 최후
병사들이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추대한 것은 미움받는 파르티아를 타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황제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로마의 영광을 내려놓아 버린 것입니다.
황제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병사들은 새 황제의 탄생을 환호했습니다.
새 황제의 이름은 엘라가발루스였습니다.
그는 카라칼라의 어머니이자 세베루스 황제의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의 자매 율리아 마이사의 외손자로, 카라칼라의 서자임을 내걸며 등장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버려진 마크리누스는 전장을 떠나 도주했습니다. 우편 배달원 행세를 하며 피신했지만 금방 붙잡혀 처형되었고, 이렇게 세상과 작별하게 됩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단 1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후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