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통치 기간은 단 86일! 제18대 로마 황제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의 승과 몰락

통치 기간은 단 86일! 제18대 로마 황제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의 승과 몰락

'현명한 황제'라 불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데에는 단순한 부자 간의 애정만이 아니라, 내전을 피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너무나도 광대했습니다. 북쪽의 브리타니아부터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서쪽의 히스파니아, 남쪽의 아프리카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각 속주에는 총독이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총독은 유능한 장군이어야 했고, 그 밑에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수도 로마 본토에는 대군이 필요 없었기에, 근위병 만여 명이 사실상 유일한 군사력이었습니다.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어느 날 각 속주의 총독들이 로마를 공격해 올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맙니다.

이번 글에서는 콤모두스 사후, 곧 시작될 내전 직전에 잠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인물,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평민에서 황제로 오른 남자

서양의 신분 사회는 동양보다 훨씬 더 엄격했기에, 평민 출신으로 황제나 왕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나폴레옹조차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니 말입니다.

페르티낙스는 바로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로, 한낱 병사 출신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그는 오늘날 제노바 인근 리구리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해방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의사나 교사는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페르티낙스는 교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손에 넣은 그는 자원입대하여 군 경력을 착실히 쌓아 올라갔습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태평성대에도 줄곧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은 일찍부터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의 파르티아 원정이었습니다.

로마령 시리아에서 재무관(프로쿠라토르)으로 승진한 그는 눈부신 공적으로 법무관 자리에 올랐고, 이후 공석 집정관 제도를 통해 비록 짧지만 집정관도 경험했습니다. 이어 모이시아 속주 총독을 거쳐 제국의 핵심 요충지인 다키아와 시리아의 총독을 차례로 역임했습니다.

황제 아우렐리우스 사후에는 콤모두스를 섬기며 브리타니아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고, 마침내 수도 관구 장관(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콤모두스가 암살당하자, 근위대장 라이투스의 추대를 받아 제18대 로마 황제로 즉위합니다.

훌륭한 군주가 될 예정이었는데…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중심의 정치를 펼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콤모두스에게 몰수당했던 재산은 주인들에게 돌려주었고, 콤모두스의 박해를 받았던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시민들에게 축하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현제처럼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약속했고, 나아가 황위를 자손에게 세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페르티낙스를 환영했습니다. 각 속주의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근위대장 라이투스만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근위대장 라이투스. 콤모두스 치세에 국정을 어지럽힌 클란데르와 함께 근위대장에 임명되었고, 클란데르가 숙청된 뒤에는 홀로 그 자리를 지켜온 인물입니다. 콤모두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당대 최고의 킹메이커였습니다.

그리고 라이투스는 페르티낙스를 살해했습니다.

새 황제의 즉위에서 불과 석 달, 정확히는 86일 후의 일이었습니다.

서기 193년 3월, 근위병들은 황궁을 습격했습니다. 페르티낙스의 나이 66세. 너무나도 안타까운 최후였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근위병들이 다음 황제의 자리를 경매에 부쳤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부유한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거액을 제시해 황제 자리를 낙찰받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릴 때의 기분을 말입니다. 하지만 페르티낙스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몇 년 뒤, 로마에는 근위대 출신의 인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세베루스 왕조가 개막되며 근위대가 해체·재편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