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영국 역사의 전환점, 성공회를 창시한 왕 헨리 8세

모든 나라의 역사에는 '전환점'이 되는 인물과 시대가 존재합니다. 영국 역사에서 그러한 전환점을 꼽으라면 단연 헨리 8세(Henry VIII)의 시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세움으로써 영국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인물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젊은 왕

1491년,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와 왕비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왕위는 형 아서가 물려받을 예정이었고, 실제로 아서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서는 결혼 직후인 1502년 갑작스럽게 요절하면서, 헨리가 웨일스 공으로서 왕세자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헨리 8세가 형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왕세자의 자리만이 아니었습니다. 형 아서는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아서의 죽음 이후 헨리 8세가 카타리나와 혼약을 맺게 됩니다. 당시 헨리는 겨우 열 살이었습니다.

1509년에는 아버지 헨리 7세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고, 카타리나와 정식으로 결혼했습니다. 명백한 정략 결혼이었고 헨리 본인도 강하게 반대했지만,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스페인 왕실과의 혼맥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헨리 8세의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때의 고위 신료들을 체포해 처형했고,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를 등용하여 추기경, 대법관(Lord High Chancellor) 등 최고 요직을 맡겼습니다.

당시 유럽 전체는 르네상스로 들끓던 시대였습니다. 아버지와 달리 헨리 8세는 사냥, 음악, 무용, 연애를 즐기는 화려한 왕이었으며, 다윗이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고대 군주들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해 교황의 통치 이전의 유럽, 곧 고대 기독교 세계를 이상향으로 여긴 것입니다.

젊은 헨리 8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원정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 원정은 쉽게 좌절되었고, 오히려 프랑스 왕과 손잡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후 토머스 울지의 외교적 성공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면서, 잉글랜드는 짧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종교 개혁과 영국국교회의 탄생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핍니다. 절대적 권력자였던 교황은 루터에게 파문과 처형령을 내리지만, 반(反)로마 진영은 유럽 곳곳에서 일어섰고, 결국 헨리 8세 역시 잉글랜드 국교회의 설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사실 헨리 8세는 초기에는 루터파의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 루터파를 견제하기 위해 각국 군주들과 '런던 조약'을 맺었고, 이 공로로 '평화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헨리 8세가 국가 교회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이혼 문제였습니다. 1527년, 종교 개혁 발생 10년 후, 헨리 8세는 정부(情婦)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하기 위해 클레멘스 7세 교황에게 카타리나와의 이혼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5세가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카를 5세는 카타리나의 조카였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헨리 8세를 로마로 소환했고, 헨리는 협상을 토머스 울지에게 맡겼지만 실패하고 말았으며, 울지는 그 책임을 지고 실각합니다.

헨리 8세는 카타리나와의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합니다. 사실 역대 교황 가운데 잉글랜드 출신은 단 한 명뿐이었고, 이 무렵까지 교황은 한 번도 잉글랜드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습니다(교황의 잉글랜드 방문은 20세기에야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잉글랜드는 대체로 교황에 대한 불만이 컸습니다.

1530년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교회와 성직자들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고, 1533년에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강행합니다. 교황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헨리 8세를 파문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끝장나고 맙니다.

바로 그해 앤 불린은 딸 하나를 낳습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받은 이 아이는 수십 년 후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여왕이 됩니다.

헨리가 세운 잉글랜드 국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사상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조직으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전역의 수도원을 해체하고 그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수도원들은 잉글랜드에서 상당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이를 귀족들과 신흥 지주 계급인 젠틀리(gentry)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 처음으로 토지 소유 구도가 이렇게 크게 바뀐 것은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성공회의 설립은 어떤 의미에서 잉글랜드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변화는 이후의 역사를 확장시키며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계 문제와 왕의 최후

앤 불린은 결국 딸밖에 낳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헨리 8세는 앤과 이혼하고 처형까지 시켰습니다. 이후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와 재혼해 간절히 바라던 아들 에드워드를 얻었지만, 그것으로도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세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들은 에드워드뿐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상당히 공격적인 인물로, 고위 신료들과 그 가족들을 상당수 처형했습니다. 앤 불린과 또 다른 왕비를 처형한 것은 물론, 영국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저서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머스 모어(Thomas More)마저 처형했습니다.

내정에서는 이렇거니와 원정에서는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아들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으나, 결국 스코틀랜드와 손잡은 프랑스군에게 격퇴되었고 원정 성과는 제로에 그쳤습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헨리 8세에 대한 평가

헨리 8세는 뛰어난 무공(武功) 같은 요소는 부족하지만 상당한 존재감을 남긴 잉글랜드의 왕입니다. 특히 왕이 수장이 되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설립은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내에서 가톨릭과 국교회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스코틀랜드와의 충돌이 빚어졌으며, 아일랜드와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잉글랜드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과 별개로, 잉글랜드의 왕이 가톨릭 신자인 상황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훗날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헨리 8세는 시대의 전환점에서 스위치를 누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