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6년 술레이만 대제가 서거하자, 새로 즉위한 술탄 셀림 2세는 즉위 직후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키프로스 정벌을 결심했다. 1570년 7월 1일, 오스만 함대는 파포스만으로 몰려들었고, 다음 날 튀르크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리마솔에 상륙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섬의 베네치아군 사령관 헥토르 발리오네(Hector Vallione)가 보유한 병력은 보병 6,000명과 기병 50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스만군은 무려 82,500명에 달했다. 그러나 내륙 진격 과정에서 연대기에 따르면 '파포스의 대장 말리피에로스'가 갑작스럽게 튀르크군을 기습하여 "많은 적을 살육하고 패주시켰으며, 생포한 두 명의 포로에게 머리 두 자루씩을 지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니코시아의 함락과 학살
베네치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의 용맹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는 1570년 9월 9일 함락되었다. 키프로스 대주교 키프리아노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니코시아 공방전을 이렇게 기록했다.
"교구마다 시골 출신 사람들이 대규모로 행진했고, 실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자리, 로마(그리스)인들의 대성당 교회 앞, 그리고 인근에서는 그 시대의 수많은 수도사와 사제들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주교 두 명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불쌍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도망치며 울부짖고 지쳐 있었다. 적은 나타나는 곳마다 칼을 들이대어 남녀노소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단 한순간에 그 아름다운 도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다. 피가 거리로 흘러 땅을 붉게 물들이고, 조금만 지나도 시신의 산더미가 쌓여갔다."
"누구는 머리가 잘리고, 누구는 손과 다리가 잘리고, 누구는 뇌수가 터지고, 누구는 내장이 땅에 쏟아져 돼지와 뒤섞였다. 돼지 역시 시민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하루가 저물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바자회가 열렸고 가장 먼저 어린 아이들과 미소녀들이 팔려나갔다. 아이들과 처녀들, 정조를 지키던 여인들을 능욕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선 이들은 목이 잘렸다!"
파마구스타 공성전
그러나 니코시아의 함락이 전쟁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파마구스타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1일, 튀르크군은 오랜 고통을 겪어온 파마구스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도시의 사령관 마르코스 안토니오스 브라간티노(Marcos Antonios Bragantino)는 병사와 키프로스 시민 4,000명, 그리고 기병 200명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한편 증원을 마친 튀르크군은 대주교 키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정규군 80,000명과 비정규군 60,000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동안 베네치아의 외교 노력으로 교황과 스페인이 키프로스 지원에 합의했다. 이를 위해 최소 120척의 전함과 25,000명의 스페인 병사로 구성된 상륙 부대를 갖춘 강력한 함대가 편성되어, 니코시아 함락 직후 카스텔로리조 해역에 도달했다.
그러나 기독교 함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고, 파마구스타의 포위된 수비군을 그들의 운명에 맡겨두었다. 튀르크군은 기독교 함대의 도착 소식을 접하고 일단 공성을 중단하고 철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기독교 함대가 마침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튀르크군은 더욱 기세등등해졌고, 도시를 더욱 촘촘히 포위했다. 그들은 약탈품과 포로들을 대형 갈레온선에 가득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러나 갈레온선은 갑자기 폭발하여 공중으로 솟구쳤고, 약탈품과 포로들은 모두 소멸했다. 키프로스 백작 루키아의 딸 아르날다(Arnalda)가 선박의 화약고에 몰래 들어가 불을 질렀으며, 튀르크인들에게 계속 능욕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불타 죽는 것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항복과 배신
한편 파마구스타의 수비군은 끝까지 버텨냈다. 튀르크군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은 쥐와 신발 밑창까지 먹으며 계속 저항했다.
그러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자, 그들은 1571년 8월 1일 항복을 결정했다. 협상 끝에 튀르크군은 수비군과 시민들을 해치지 않겠으며, 베네치아령 크레타로 갈 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 6일, 튀르크군 사령관 무스타파 파샤가 예니체리 군단과 함께 요새에 입성했다. 그러나 즉시, 그들이 즐겨 하는 관행대로 튀르크인들은 합의를 위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스타파는 베네치아 사령관 브라간티노에게 젊은 병사 한 명을 '인질'이라는 명목으로 넘겨 능욕하라고 요구했다.
파마구스타 공성전을 담은 당대 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