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시대의 격동 속을 살아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튜어트 가문으로 넘어갔고, 이로써 잉글랜드에 스튜어트 왕조가 열리게 됩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초대 국왕은 제임스 1세였지만, 사실 그의 어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처형당한 비운의 인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태어나다

시대의 격동 속을 살아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영국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본래 별개의 왕국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합니다. 혹은 아예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브리튼 섬에 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이 섬은 남쪽의 잉글랜드와 북쪽의 스코틀랜드로 나뉘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 남부는 게르만 계통의 앵글로색슨인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와, 켈트계 주민이 많이 살던 웨일스로 다시 구분됩니다.

메리는 1542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제임스 5세가 사망했고, 아들들은 모두 요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메리는 태어난 지 겨우 6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정무를 맡을 수는 없는 법. 실질적인 정치는 섭정 제임스 해밀턴 백작이 대행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헨리 8세의 치세였습니다. 헨리 8세는 어린 메리를 당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6세)와 약혼시키려 했지만, 메리의 생모는 딸이 정치적 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그녀를 프랑스로 보내 살도록 결정합니다.

이후 메리는 프랑스어를 더 선호하게 되었고, 성씨 표기도 '스튜어트(Stewart)' 대신 프랑스식 '스튜어트(Stuart)'를 사용하게 됩니다. 메리는 평생 프랑스를 사랑했는데, 어쩌면 고향 스코틀랜드보다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1558년, 메리는 프랑스 왕세자 프랑수아와 결혼합니다. 같은 해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는데, 엘리자베스는 가톨릭을 억누르고 개신교 성격의 잉글랜드 국교회를 정통 교회로 확립했습니다. 이에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진영이 크게 반발했고, 프랑스 국왕과 교황은 엘리자베스 1세가 아니라 메리야말로 잉글랜드의 정통 여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모친 앤 불린이 처형된 데다 엘리자베스 자신도 한때 서자 취급을 받았던 점을 생각하면, 당시 가톨릭 진영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같은 해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사망하면서 왕세자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2세로 즉위했고,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이 해는 서유럽 여러 나라가 술렁인 격동의 해이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개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잉글랜드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봉기했습니다.

가톨릭을 내세운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격렬히 충돌합니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세력을 지원했고, 프랑스는 함대를 파견했지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양국 사이에 에든버러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내정에 개입하지 않기로 합니다.

1560년, 메리의 남편 프랑수아 2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는 겨우 16세였습니다.

홀로 스코틀랜드의 통치자가 된 메리는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를 정치 고문으로 삼고, 국내 종교 문제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가톨릭 신자가 여전히 많았지만, 오빠 제임스를 포함한 개신교 세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종교 화해 없이는 안정적인 통치가 불가능했다는 현실적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재혼, 연인의 죽음, 출산, 그리고 남편의 죽음

시대의 격동 속을 살아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메리 스튜어트의 생애는 눈이 아찔할 만큼 굴곡진 여정이었습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헨리 스튜어트, 다른리 경과 재혼합니다.

다른리 경은 잉글랜드 왕실의 혈통을 이은 스튜어트 가문 출신이었기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의 등장이 왕위 계승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까 깊이 경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엘리자베스의 우려가 적중합니다. 다른리 경과 메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리가 제임스를 임신 중이던 시절,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메리는 피에몬테 출신 이탈리아 음악가이자 자신의 비서였던 리치오라는 인물을 깊이 신뢰하고 총애하고 있었습니다.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에 반발하여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손잡고 누이에 대한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은 잉글랜드 측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실패로 끝났지만, 귀족들의 메리에 대한 반감은 강하게 남았습니다.

1566년, 몇몇 귀족들이 스코틀랜드 왕궁에 난입해 메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리치오를 살해해 버립니다.

이듬해에는 남편 다른리 경마저 살해당합니다.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메리와 보스웰 백작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메리는 보스웰 백작과 결혼하는데, 이에 분노한 귀족들이 메리 여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결국 메리는 잉글랜드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메리의 말년

시대의 격동 속을 살아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잉글랜드로 망명한 뒤 약 20년 동안 메리는 감금된 신세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음모에 여러 차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결국 1587년 엘리자베스 1세의 명으로 처형당하고 맙니다.

교황과 가톨릭 국가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교황의 축복과 함께 자국의 대함대 아르마다를 잉글랜드로 파견합니다.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마다 해전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