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에 서기 전, 세 번의 목숨
점령 폴란드의 악명 높은 총독 한스 프랑크(Hans Frank)는 1946년 10월 16일 뉘른베르크 감옥의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른바 '폴란드의 왕'은 그로부터 약 3년 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병사들이 조직한 암살 작전으로 인해 거의 비참한 최후를 맞을 뻔했다.
기습의 배경
1944년 1월 말,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크게 밀리고 있었고 아펜니노 반도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돌프 히틀러 집권 11주년 축하를 막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점령 폴란드에서는 나치가 1월 30일, 총독부(Generalgouvernement) 설립 4주년 행사까지 겹쳐 성대한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스 프랑크는 1946년 10월 16일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사실 1944년 1월에 이미 이 세상과 작별할 뻔했다.
이를 계기로 총독 프랑크는 중앙 기념식이 열리는 리비우(Lwów)로 열차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었다. 폴란드 지하 저항세력 역시 이 슬픈 기념일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축하'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증오하는 전범을 저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작전 계획과 준비
총독은 오랫동안 암살 대상 명단의 최상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를 겨냥한 작전이 초래할 대규모 보복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동안은 바벨 언덕의 '주인'의 일상 일정을 면밀히 관찰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점령자의 무자비한 테러와 동부 전선의 접근은 끝내 크라쿠프 지구 국내군 사령부의 결심을 굳혔다.
1944년 1월 20일경, 크라쿠프 지구 사령관 유제프 스피할스키(Józef Spychalski) '루티' 대령은 리샤르드 누시키에비치(Ryszard Nuszkiewicz) '슬로프' 중위에게 프랑크가 리비우로 향하는 열차를 폭파할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총괄 지침에는 화력 매복 진지 구축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슬로프'는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 단계는 당연히 폭발물을 설치할 적절한 장소 선정이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은 니에포워미체(Niepołomice) 숲, 더 정확히는 포들렝제(Podłęże)와 그로트코비체(Grodkowice, 현재 샤루프)역 사이 구간이었다.

점령기 크라쿠프 중앙역. 한스 프랑크는 이곳에서 인생 마지막 여정을 시작할 뻔했다. (사진 출처: 『점령기의 크라쿠프 1939-1945』, 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2010)
누시키에비치는 훗날 저서 『다이너마이트 — 폴란드 남부 저항운동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야레마'에게 상황 도면을 제출하면서 나는 추두프-니에포워미체 도로와 그로트코비체역 사이에 위치한 저수지 일대를 매복지로 제안했다. 철도변의 작은 호수와 숲은 화력 매복 작전에 중요한 이점이었고, 철도 노선 자체는 다른 구간과 비교해 특별히 좋거나 나쁘지 않았다.”
계획이 완성되자 이제 실행 인원을 배정할 차례였다. '블리스카비차(Błyskawica)' 부대와 창설 중이던 '그롬(Grom)' 부대, 총 25명의 병사가 투입되기로 했으며, 여기에 수 명 규모의 광산 요원팀도 합류했다.
작전 전체의 지휘는 AK 지구 참모부 연락 장교인 스타니스와프 비엥코프스키(Stanisław Więckowski) '바사치' 소령에게 맡겨졌다. 또한 빌리치카(Wieliczka) 교란 부문 사령관 미에치스와프 치에실리크(Mieczysław Cieślik) '봉크' 대위 휘하 병력은 비스와 강 도하 기만 작전 준비를 담당했다.
준비의 다음 단계는 폭발물 확보와 함께, 선로 폭파로 인한 파괴력을 보완할 충분한 수의 기관총과 수류탄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무엇보다 지구 사령부가 '바사치'가 요청한 플라스틱 폭약이나 기타 강력한 폭발물을 공급하지 못했다. 결국 빌리치카 소금광산에서 확보한 분말 TNT로 만족해야 했고, '슬로프'와 '마르스'(지그문트 카베츠키 중위)가 이를 직접 가공해 사용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단 1초 늦었다』는 글은 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MHMK)과의 협업으로 게재되는 시리즈 중 하나로, 2010년 이 기관이 발간한 앨범 『크라쿠프 — 점령의 시대 1939-1945』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게다가 경기관총 3정과 수류탄 100개조차 도착하지 않아, 처음부터 효과적인 화력 매복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엥코프스키 소령이 심한 독감에 걸려 사실상 작전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했고, 그의 임무는 마지막 순간에 누시키에비치 중위가 대신 떠맡아야 했다. 그럼에도 작전 강행이 결정되었고, 1월 29일 밤 9시경 최종 준비가 시작되었다.
암살 시도의 순간
한편 크라쿠프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프랑크와 일행(SS상급집단지도자 빌헬름 코페 포함)이 밤 10시 30분 중앙역으로 향해 리비우행 열차에 탑승했다. 물론 그들은 일반 객차가 아닌 두 개의 호화 살롱차를 사용했다. 프랑크는 부관 헬무트 파펜로트와 세 명의 장교와 함께 1006호 살롱차에, 코페와 세 명의 나치 고위 인사는 1001호 살롱차에 탔다. 여기에 독일 철도 경찰 본부 소속의 무장 장교 25명이 제3 객차에 배치되었다. 밤 10시 45분, 급행열차(D-Zug)는 갈리치아 지구의 중심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실패한 암살 시도를 기리는 기념비.
같은 시각 22km 떨어진 매복지에서는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공병 요원들은 이미 폭발 장치를 설치한 뒤 열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1시 15분경 열차가 발견되었고, 2분 후 밤의 고요는 강렬한 폭발음으로 찢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폭발은 문자 그대로 단 몇 분의 1초 늦게 일어났다. 한스 프랑크의 전기를 집필한 디터 셴크(Dieter Schenk)는 이렇게 기술했다.
“폭발로 1006호 살롱차의 마지막 차축 바로 뒤 구간의 레일 약 1미터가 침목에서 뜯겨 나가며 살롱차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1001호 살롱차는 선로를 이탈해 침목 위를 미끄러졌고, 그 뒤에 딸린 경호 차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인들은 놀라운 행운 덕분에 멍과 찰과상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열차가 멈추자마자 총독의 경호원들이 차에서 쏟아져 나와 주변 숲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고, 이 과정에서 조명탄으로 일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군은 미리 계획된 철수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폭파 요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탈출했고,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큰 어려움 없이 이탈에 성공했다. 문제는 독감으로 몸이 약해진 '바사치'(그럼에도 작전에 참여했다)가 도중에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동료 '슬로프'와 '스포코이니'(헨리크 야누시키에비치 중위)가 그를 부축해 몇 킬로미터를 이동했고, 빌리치카 근처의 친절한 농가에서 임시 은신처를 찾아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한스 프랑크 암살 미수 사건 현장. 현대의 모습.
한편 프랑크는 몇 시간 후 다른 호위대와 함께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흥미롭게도 이 공격은 그가 리비우에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항공 이동을 택했을 뿐이다. 사용한 기체는 군용 수송기 융커스 Ju 52였다.
잔혹한 보복
물론 점령자들이 이 사건을 '적절한' 결과 없이 넘길 리 없었다. 국내군은 미리 입수해 둔 소련 전단을 현장에 뿌려 이 공격을 소련 게릴라의 소행으로 위장하려 했지만, 코페와 그의 부하들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앨범 『크라쿠프 — 점령의 시대 1939-45』에 실린 그제고시 예조프스키(Grzegorz Jerzozwski)의 글은 이렇게 전한다. “프랑크에 대한 공격의 보복으로 독일군은 폴란드인 100명을 총살했다.” 집단 처형은 포들렝제와 뎀비차(Dębica)에서 자행되었으며, 희생자는 주로 몬텔루피흐(Montelupich) 정치범 수용소의 수감자들이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전시
크라쿠프 시립역사박물관 '포모르스카 거리' 분관(포모르스카 2번지, 화요일~일요일 개관)에서는 상설 전시회 「테러에 맞선 크라쿠프 시민들 1939-1945-1956」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