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발루아(Henri de Valois)의 통치는 폴란드인들에게 뼈아픈 실망이었다. 이후 크라쿠프 왕좌에 오른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역시 10년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는 기회만 된다면 폴란드 왕관과 헝가리 왕관을 맞바꾸고 싶다고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결국 1586년, 대귀족들은 더 이상 외국 출신 군주를 참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폴란드인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심했고,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내용과 달리 실제로 그렇게 해냈다.
야기에우오 가문의 마지막 희망, 안나
안나 야기에우온카(Anna Jagiellonka)의 역사적 역할은 아무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다. 그녀의 가장 훌륭한 전기를 쓴 역사가 마리아 보구츠카(Maria Bogucka)조차 여왕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남겼다. "그다지 총명하지 못하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으며, 시시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에 동의하기란 어렵다.
물론 안나가 어머니 보나 스 포르차(Bona Sforza)의 정치적 재능을 온전히 물려받지는 못했다. 그녀는 실수를 저질렀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순진한 면모도 있었다. 그럼에도 말년에 이르러 그녀는 평생의 최대 목표를 이뤄냈다. 바로 폴란드 왕좌를 다시 야기에우오(Jagiellon) 가문의 손에 되돌려 놓은 것이다.
안나 야기에우온카. 그녀는 왕관을 다시 야기에우오 가문의 손에 넣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모계로 이어지는 왕조의 마지막 남계 후손은 스웨덴 왕자 지그문트 바사(Zygmunt Waza)였다. 그는 지그문트 1세(구왕)의 손자이자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였다.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폴란드어와 폴란드의 관습을 배웠고, 자신이 스웨덴인인 만큼 폴란드인이며 야기에우오 가문의 일원이라는 확신 속에 성장했다. 안나는 이 왕관을 그의 손에 쥐여주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황마저 그녀의 편이었다
1576년, 스테판 바토리의 선거 무렵에는 안나에게 이 계획을 실행할 자금도 없었고, 지그문트 역시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그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러나 10년 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안나는 바토리가 생전일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1585년에는 처음으로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고, 1586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 프로젝트를 알렸다.
무엇보다 그녀는 국고에 점점 더 대담하게 손을 뻗었다. 평소에는 플로린 한 닢까지 따지며 검소하게 살았지만, 지그문트의 선거 운동에는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어느새 주교총대(프리메이트)를 필두로 한 거의 전체 원로원과 주교단이 그녀의 진영에 서 있었다. 교황 식스토 5세 역시 안나를 지지했다.
이 모든 지지자들이 지그문트를 밀어준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에게 그는 야기에우오 가문의 후손이자 폴란드인이었기 때문이다. 소하체프 성주 스타니스와프 고스톰스키(Stanisław Gostomski)는 "나는 스웨덴 왕자 폐하의 편에 선다. 나는 그를 피아스트(Piast)로도 여긴다"고 선언했다. 영향력 있는 대귀족 콘스탄티 비슈니오베츠키(Konstanty Wiśniowieck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그문트 바사가 자신에게는 마치 "아우구스투스 왕의 아들"과 같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지그문트 3세 바사. 태어날 때부터 폴란드의 왕으로, 그리고 야기에우오 가문의 일원으로 교육받으며 자랐다.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바사 왕조' 신화
1587년 지그문트가 마침내 폴란드 왕위에 오르자, 그는 널리 왕조의 계승자로 여겨졌다. 그의 두 아들 역시 같은 대접을 받았다. 야기에워(Jagiełło)의 후계자라는 사실만으로 선거에서의 승리가 사실상 보장된 셈이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ładysław IV Waza)의 이름은 그룬발트 전투의 영웅에서 따온 것이었다.
심지어 지그문트와 정적으로 대립하던 야ン 자모이스키(Jan Zamoyski)조차 1605년 이렇게 말했다. "폐하는 야기에워의 후손이시므로, 폐하의 아들들의 왕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권력의 정점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주교총대 얀 웽지크(Jan Wężyk)는 1632년 단호하게 선언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조국을 다스릴 수 있었던 왕조는 피아스트와 야기에우오, 단 두 개뿐이었다." 그에게 폴란드에 바사(Vasa) 왕조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역사가 얀 스파친스키(Jan Szpaczyński)는 이렇게 덧붙인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의 왕일 때만 바자라고 느꼈고, 바자였던 곳도 오직 스웨덴뿐이었다. 반면 폴란드에서는, 폴란드의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서 그는 스스로를 야기에우오 가문의 일원으로 여겼다."
이런 왕조상의 복잡한 문제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벌어진 일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론상 1740년, 여성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권력을 잡으면서 "단절"되었다. 1762년 러시아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로마노프 가문의 피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인조차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 두 위대한 가문이 18세기에 멸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폴란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직 19세기의 역사가들만이 야기에우오 가문의 스웨덴 계열을 경멸하며, 폴란드를 다스린 '바사 왕조'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출처
야기에우오 가문의 복잡한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카밀 야니츠키(Kamil Janicki)의 저서 『황금기의 여인들(Ladies of the Golden Age)』(Horizon, 2014)을 참고하라. 이 글은 저자가 집필 과정에서 수집한 문헌과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의 다른 버전은 『뉴스위크 히스토리(Newsweek Historii)』 2015년 2월 호에 게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