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린(saccharin). 감미료 생산에 가장 널리 쓰이던 화학 물질이자, 동시에 전쟁 직전 폴란드에서 불법 부자를 양산한 원천이었습니다. 감미료 한 봉지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고, 감옥에 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법은 단호했다, 감미료 전면 금지
규정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1926년 8월 2일 제정된 재정형법에 따라 인공감미료는 전면 불법화되었고, "인공 감미 물질의 생산, 판매 및 사용"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국고가 설탕으로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탕은 힘이 난다"는 문구가 대중에게 알려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멜히오르 반코비치(Melchior Wańkowicz) 등이 기획한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에는 건강상 근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설탕에는 막대한 소비세가 붙었고,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킬로그램당 최대 15즐워티에 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마지막 회계연도에 국가는 1억 1,800만 전쟁 전 즈워티(오늘날 가치로 10억 이상!)를 거두었습니다.
긴 겨울밤을 위한 완벽한 선물? 감미료로 가득 찬 자동차! (1929년 잡지 'Auto' 표지 삽화)
달콤한 엘도라도
궁리하는 폴란드인들은 대체품으로 나름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해외에서 설탕을 밀수하는 것은 번거롭고 비실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미료는 정반대였습니다. 실제 설탕 1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양이 손바닥 위에 올라올 정도로 작았으니까요.
사카린은 순식간에 밀수업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 중 하나가 되었고, 국경경비대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1928년 12월 '가제타 샤모툴스카(Gazeta Szamotulska)'가 보도한 기사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국경수비군(KOP) 순찰대가 담배와 사카린을 다량으로 폴란드에 반입하려던 밀수꾼 몇 명과 마주쳤다. 순찰대의 모습을 본 밀수꾼들은 담배 117kg과 사카린 5kg을 버린 채 도주했다."
또한 1933년 1월 우치 지역 신문 '에코(Echo)'는 이렇게 열거했습니다. "국경수비대원들이 수만 즈워티 상당의 밀수품을 압수했다. 주류 34kg, 사카린 26kg, 1,500즐워티 상당의 바닐라 15kg, 오렌지 20kg, 훈제 청어, 담배, 시가 및 기타 물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달콤함에 대한 집착. 전쟁 전 신문들의 선정적인 헤드라인들.
이런 검거가 거의 매일 있었지만, 수백 명의 밀수꾼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감미료 운송만을 전문으로 하는 갱단 조직까지 생겨났습니다. 특히 민첩하기로 유명했던 조직은 국경 도시 벵진(Będzin) 출신의 사업심 강한 유대인들이 이끌었는데, 6개월 동안 최소 1,500kg의 사카린을 밀반입했습니다.
사카린으로 불어나는 재산
"그 조직은 차량 5대, 뻔뻔한 밀수꾼 십여 명, 그리고 매일 소량의 사카린을 국경을 넘어 운반하던 수십 명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 1934년 1월 '서부 폴란드'지가 보도한 내용입니다. 가장 큰 규모의 운송은 벵진으로 향했는데, 무려 엔진 아래에 감미료 전용 수납 공간을 설치한 차량으로 운반되었습니다!
한 조직이 소탕되면, 때로는 더 대담한 새 조직이 그 빈자리를 메웠습니다. 같은 해 늦봄, 신문 'ABC 데일리 매거진'은 독일령 비톰(Bytom)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조직을 보도했는데, 이들은 독일의 국제 사카린 카르텔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밀수 규모는 사카린 772kg, 즉 설탕 40만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기자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폴란드 당국이 '사카린 밀수의 왕'이라 불리던 지미그로츠와 사페르의 조직을 해체하자, 사카린 신디케이트가 이 작전에 나선 것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달콤한 분쟁
이런 스캔들은 국내외 관계에 불쾌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인 엔데치아(Endecja)는 유대인들이 감미료로 재산을 불린다고 비난했고, 유대인이 아니라면 독일계 주민들이 원흉으로 지목되곤 했습니다. 정부는 독일과 리투아니아 당국에 대응을 요구했습니다. 처벌도 가혹했습니다. 무거운 벌금과 징역형이 내려졌고, 감미료를 구입한 것만으로도 몇 개월간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당국은 구입 행위조차 밀수로 간주했습니다.
폴란드 국경 초소. 저 너머에는? 감미료의 바다.
밀수꾼들은 목숨까지 걸어야 했습니다. 신문들은 국경순찰대가 감미료 밀수꾼에게 발포했다는 보도를 여러 차례 실었습니다. 그러나 사카린 밀수 조직들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가제타 샤모툴스카'는 1928년 겨울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올키에니키(Olkieniki) 지역에서 KOP 순찰대가 또다시 밀수꾼들과 조우했다. 병사들이 '멈춰라'라고 외치자, 밀수꾼들은 권총 발포로 응답했다. 짧은 총격전 끝에 그들은 설탕 100kg을 버린 채 도주했다."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폴란드인들은 차에 단맛을 더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 돈벌이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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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다른 판본은 2014년 11월호 '뉴스위크 히스토리아'(11/2014)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