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무용수, 논란을 일으킨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뮤즈. 게다가 양성애자였고 조현병까지 앓았던 인물… 바츠와프 니진스키에 대해 말할 것은 많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춤의 신이라 불릴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고, 수많은 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단 위에서 빠르게 끌려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춤은 그의 피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토마시 니진스키와 어머니 엘레오노라 베레다는 폴란드계 발레 무용수였습니다. 그 역시 마음만은 폴란드인이었습니다. 1889년 3월 12일 키예프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성십자가 교회(오늘날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곳)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훗날 가수 예지 레슈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젖과 폴란드어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폴란드인입니다. (...) 저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말하지 못합니다."
무대를 위해 태어난 소년
바츠와프와 그의 형제 자매가 태어나기 전, 토마시와 엘레오노라는 순회 공연단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은 안정을 원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해 제국 마린스키 극장에 취직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의 생활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다른 여자를 따라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기 전까지는요.
바츠와프는 어린 시절부터 발레에 남다른 감각을 보였습니다. 그 자신이 회고했듯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부모님은 저에게 걷고 말하는 것을 배우듯 자연스럽게 춤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첫 이가 난 것을 분명히 기억하실 어머니조차, 제 첫 레슨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말씀하지 못하십니다."
그는 춤에는 뛰어났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확실히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던 내성적인 소년은 또래들과 친구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발레 동작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일반 교과목을 꾸준히 무시하며 숙제는 누이 브로니스와바에게 떠넘겼습니다. 이 대가는 결국 그에게 고스란히 돌아왔습니다. 비올레타 비에르니츠카는 저서 『러시아를 놀라게 한 폴란드인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편중된 관심사 탓에 바츠와프은 독서가 부족한 인물이 되었고, 기초 수준조차 어떤 외국어도 익히지 못했습니다. 이는 국내외 공연 기간 내내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그의 격정적이면서도 극도로 짧았던 — 고작 6년밖에 지속되지 않은 — 커리어를 막지 못했습니다.
의상 스캔들
1907년 니진스키는 제국 연극학교를 졸업하고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역으로 마린스키 극장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그의 재능을 외면할 수 없었고, 실제로 거의 아무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러시아 무용수들이었던 타마라 카르사비나, 안나 파블로바, 마틸다 크셰신스카가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바츠와프의 다른 '연인들'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파벨 리보프 공작과 러시아 발레단의 전설적인 창립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바로 그들입니다.
1911년, 그는 스캔들 속에서 마린스키 극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유는 바로… '지젤' 공연에서 너무 꽉 끼는 의상을 입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몸에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었지만, 당시 무용수들이 착용하던 짧은 반바지는 입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허벅지는 "관객들에게 그 온전한 영광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오직 디아길레프의 무대에서만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정점에 올랐습니다. 비올레타 비에르니츠카는 이렇게 평합니다.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는 클래식 발레 훈련을 받은 남성 무용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 발레단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까지 춤은 여성의 활동으로 여겨졌고, 남성 역할은 여성들이 남장(en travesti)하여 추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 단의 다른 무용수들은 그곳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안무가로서도 발레에 혁명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1912년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로 첫 안무 작품을 선보였지만, 관객들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발레를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고, 에로틱한 장면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안무에도 같은 반응이 되돌아왔습니다.
장 콕토조차 니진스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균형의 모든 법칙을 전복시키고 뒤집어 놓았다. 마치 천장에 그려진 인체의 형상처럼, 그는 허공에서 가벼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의 별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쟁을 추겠습니다"
1913년, 유망했던 그의 커리어는 잔인하게 끊어졌습니다. 또다시 발레단에서 쫓겨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 발레단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체류 기간 중 니진스키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무용수 로몰라 데 풀스키와 결혼했습니다. 비올레타 비에르니츠카는 이렇게 전합니다.
"분노한 디아길레프는 이 폴란드인에게 '당신의 서비스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결혼 소식은 무용수의 어머니에게도 불쾌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이 폴란드 여성과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요 — 제국 마린스키 극장 솔리스트이자 오페라 가수인 마리아 필츠와요. 엘레오노라는 '바츠와프와 마루샤'가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바츠와프 니진스키는 20세기 최고의 무용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딸 키라를 낳을 만큼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조부모와 부모를 닮아 그녀 역시 훗날 무용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츠와프에게 이것은 종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불행이 그를 잇달아 덮쳤습니다. 자신만의 발레단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화려한 실패로 끝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시민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억류되었습니다(디아길레프와 '결별'한 뒤 그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그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년 뒤 전 연인이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 슈트라우스의 발레 '틸 오일렌슈피겔'에 출연하게 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참담했습니다.
1918년, 니진스키는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적십자 자선 행사에서 춤을 추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는 춤 도중 갑자기 멈춰 서더니 검붉은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바닥에 놓고 관객에게 선언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멈추지 않는 전쟁을 추겠습니다…"
얼마 후 그는 조현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어찌 보면 예감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니진스키 가문에서는 가족력이었으니까요. "음식 섭취를 완전히 거부한 끝에 세상을 떠난 그의 할머니와, 그의 형 스타니스와프 역시 조현병을 앓았습니다"라고 비올레타 비에르니츠카는 책에서 말합니다.
폐위된 춤의 신, '세계 제8대 불가사의', '인간-새', 그리고 전성기의 섹스 심볼은 인생의 마지막 30년을 여러 정신병원을 떠돌며 보냈습니다. 가족들의 회상에 따르면 바츠와프는 곁에 있는 그들에게 완전히 무심했고, 마치 "아메바를 닮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는 당시 혁신적인 인슐린 요법을 받았는데, 긍정적이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 효과에 그쳤습니다. 그는 1950년 4월 8일 런던에서 신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953년 파리 몽마르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