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한 명의 시각장애인이 군대에 입대했고, 말을 탔고, 역마차를 몰았으며,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와 다리를 건설했고,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고요. 아마 농담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장님 잭(Blind Jack)'으로 알려진 존 메트칼프(John Metcalf)의 삶은, 시각장애가 반드시 인생의 한계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존 메트칼프는 1717년 8월, 잉글랜드 노스요크셔의 소도시 크네즈버러(Knaresborough)에서 가난한 말 사육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6살 때 천연두에 걸리면서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장애는 그가 인생을 마음껏 누리고 성공을 거두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직업 분야뿐만 아니라 사랑에서조차 말입니다.
다재다능한 천재, 미스터 메트칼프
장님 잭의 첫 번째 성공은 어린 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 연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원래 이 기술은 소년의 생계 수단이 될 예정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존은 상당히 재능 있는 음악가로 자라났고, 10대 시절부터 지역 호텔과 선술집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음악만이 그가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력을 잃었음에도 그는 수영과 다이빙, 카드 게임을 즐겼고, 말도 능숙하게 탔으며 사냥도 좋아했습니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모험심 덕분에 자신이 사는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방문객들의 안내인으로 일하며 추가 수입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놀라운 성격과 뛰어난 능력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21세 되던 해, 해러게이트(Harrogate)의 더 그랜비(The Granby)에서 열린 공연에서 첫사랑 도러시 벤슨(Dorothy Benson)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곳 주인의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뜨겁게 빠져들었지만, 존이 동시에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 여성이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계는 급격히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성과 결혼할까 두려웠던 돌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을을 떠나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잭은 요크셔 해안선을 따라 뉴캐슬로, 그리고 런던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로 바이올린 연주로 생계를 유지했고, 길 위에서 값진 인연들을 하나씩 쌓아갔습니다. 수개월간의 방황 끝에 고향이 그리워진 그는 수도에서 도보로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도러시가 지역 구두공과 약혼했고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식은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존이 신부가 될 여성을 설득해 함께 도망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여성의 가족은 몹시 분노했지만, 돌리와 장님 잭의 결혼 생활은 의외로 매우 행복했습니다. 두 사람은 네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메트칼프는 계속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찾아 나섰습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이전에 쌓아둔 인맥 덕분에 순조롭게 입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웨이드 장군(General Wade) 부대의 하사관 보조가 되었고, 1745년 발발한 자코바이트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그가 직접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지만, 팔커크(Falkirk)와 컬로든(Culloden) 전투에서는 병사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또한 후방에서 총검을 손질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일을 도왔습니다.
존은 도박을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친구인 조지 리델 대령(Colonel George Liddell)과 10기니를 걸고, 런던에서 해러게이트까지 333킬로미터를 대령의 마차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다고 내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5일 반 만에 목표를 달성하며, 허름한 도로 상태 때문에 발이 묶인 대령을 따돌렸습니다. 참고로 도로의 상태 문제는 이후 메트칼프의 인생에서 여러 번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장님 도로 건설자
1750년대 초, 존은 운송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크네즈버러-요크 노선의 역마차를 몰며 승객들을 나르던 중 노면 상태의 문제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같은 시기 영국 의회는 국내 도로의 건설과 개보수를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은 인프라 개발을 담당하고 유지비용을 징수할 회사의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메트칼프는 확고한 의지와 남다른 재주 덕분에 민스킵(Minskip)과 페렌스비(Ferrensby) 구간 건설 계약을 따내며 도로 기술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18세기는 도로 건설 분야가 아직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님 잭이 제안한 해결책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도로는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하며, 노면은 볼록하게 솟아 있으면서 동시에 배수가 잘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층 공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돌을 깔고 그 위에 재료 혼합물을 붓고, 마지막으로 자갈로 전체를 덮는 방식이었습니다. 메트칼프는 또한 이탄 습지 위에 길을 만드는 공법의 선구자로도 평가받습니다. 이때 그는 헤더와 가시덤불류 식물로 엮어 만든 뗏목을 활용했습니다.

크네즈버러에 세워진 장님 잭 동상.
그는 프로젝트마다 수많은 인부를 고용했지만, 측량에서 계획, 비용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그의 도로 기술자 경력은 무려 27년간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290킬로미터가 넘는 도로와 다리, 배수로, 옹벽을 건설했습니다. 그것도 단 하루라도 전문 교육을 받은 적 없이 말입니다.
그는 75세에 은퇴하여 딸 중 한 명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했습니다. 이후 조용한 여생을 보낸 그는 1810년 4월 26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님 잭은 인간의 결단력이 수많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살아있는 본보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