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왕국, 최악으로 치닫던 군세
덴마크는 그 작은 국토에 어울리지 않게 오랜 군사 전통을 지녀온 왕국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덴마크군은 정치적인 이유로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이 덴마크를 침공했다.
당시 집권한 '진보' 정부는 군의 동원령 선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덴마크군은 극히 적은 현역 병력만으로 무장한 침략자를 마주해야 했다. 전투 자체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종결되었지만, 덴마크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독일군에게 입힌 피해는 자신들이 받은 피해보다 수 배에 달했다.
동원조차 금지된 14,550명의 군대
1937년 국방법에 따르면 덴마크 육군의 규모는 고작 14,550명이었다. 매년 6,000명의 징집병이 소집되어 11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는 체계였는데, 이 정도 병력으로는 평시 군 운영 요구조차 충족하기 어려웠고, 독일군을 상대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덴마크 정부는 히틀러와 맺은 불가침 조약에 의존해 군대 증강을 거부했다. 히틀러의 말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산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골동품' 전투기 52대가 전부였던 항공전력
1940년 당시 덴마크 육군의 전력은 보병연대 8개, 기병연대 2개, 포병연대 3개, 대공포병연대 1개, 공병연대 1개, 수송대대 1개와 각종 지원 부대, 그리고 노후한 '골동품'급 항공기 52대로 구성된 4개 비행중대가 전부였다.
보병 연대의 편제
육군의 핵심인 보병은 약 5,000명씩의 연대 단위로 편성되었다. 8개 연대 가운데 하나는 왕실 근위연대, 하나는 자전거보병연대, 나머지 6개는 일반 보병연대였다. 각 연대는 참모부, 수송반과 탄약반이 포함된 본부중대, 그리고 통신소대·대공소대·정찰소대·공병소대·의무소대를 갖추었다.
연대 산하에는 보병지원포병중대 1개와 보병대대 3개, 야전대대 1개가 배속되었다. 각 보병대대는 1,469명으로 구성되어 지휘중대 1개와 230명 규모의 중대 4개를 두었다. 이 중대들은 '경기관총 중대'라 불렸으며, 병사들은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대대에는 기관총소대·박격포소대·대공소대로 이루어진 중화기중대도 있었다. 왕실 근위연대 역시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편제였다.
특수 부대: 제6 자전거보병연대와 보른홀름 부대
제6 자전거보병연대는 별도의 편제를 따랐다. 이 연대는 각 788명 규모의 대대 2개를 두었고, 각 대대는 자전거보병 중대 3개와 오토바이 중대 1개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중화기중대 1개와 징집 대대 2개가 추가 배속되었다.
보병에는 보른홀름섬의 이름을 딴 '보른홀름 부대'도 속해 있었다. 이 부대는 징집 보병중대 7개로 이루어졌다. 한편 이름과 달리 보병 선발공병(파이오니어) 사령부 역시 보병 예속 부대였다. 이 사령부는 각 1,000명 규모의 대대 2개로 구성되었으며, 각 대대는 자전거보병 중대 3개, 오토바이 중대 1개와 공병 요원들로 편성되었다.
새벽 4시 15분, 침공 개시
이들의 임무는 국경을 경비하는 동시에 도로망의 주요 지점 등을 파괴하여 독일군의 침공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침공은 1940년 4월 9일 새벽 4시 15분에 시작되었다. 공격은 '베저위붕(Weserübung)'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 제31군단이 담당했다.
독일군은 윌란(유틀란트) 반도를 통해 덴마크 영내로 진입했고, 제1낙하산병연대는 덴마크 방어선 북쪽 깊숙한 곳에 공수강하했다. 덴마크 육군 총사령관 빌리엄 프라이어 중장은 이미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정부에 동원령 발령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몇 시간의 영웅적 저항, 그리고 항복
결국 방어의 무거운 짐은 주로 선발공병 사령부가 짊어져야 했다. 이들의 병사들은 정부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할 때까지 영웅적으로 저항했다. 교전 과정에서 덴마크 군인 16명과 일부 민간인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독일군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민간인도 적지 않았다. 반면 독일군의 손실은 전사·부상·포로를 모두 합쳐 203명에 달했고, 전차와 장갑차 16대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