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의 실패 (1944년 7월 20일)

늑대소굴에서 터진 폭탄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대령을 중심으로 한 군인과 민간인 그룹은 철저히 경비된 '늑대소굴(Wolf's Lair)' 내부의 목조 막사에서 열린 회의 도중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퓌러(총통)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불과 2미터 떨어진 곳에 1킬로그램짜리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폭발하는 순간에도 히틀러는 돋보기로 항공 정찰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가 이미 시작된 뒤에야 회의장에 들어섰습니다. 청력에 문제가 있다며 히틀러 바로 근처 자리를 요청했고, 입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핑계를 대고 모자를 두고 나갔습니다. 모자를 남겨두는 것은 '곧 돌아온다'는 신호였지만, 곧 발언을 해야 할 차례였던 탓에 다소 수상하게 여겨졌습니다.

폭발 직후 슈타우펜베르크와 부관 하프텐(Haeften)은 여러 어려움을 뚫고 경비 구역을 빠져나와 베를린으로 비행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반드시 사망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24명이 있던 회의장, 희생자들

폭발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히틀러는 적의 공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폭탄이 터질 당시 막사에는 24명이 있었으며, 가장 크게 다친 11명은 3킬로미터 떨어진 야전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속기사 H. 베르거, H. 브란트 대령, G. 코르텐(G. Korten) 장군 등 일부는 몇 시간 안에 사망했고, R. 슈문트(R. Schmundt) 장군 역시 몇 주 뒤 부상이 악화되어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의 실패 (1944년 7월 20일)

기적처럼 살아남은 히틀러

그러나 히틀러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옷이 너덜너덜해진 채 스스로 폐허가 된 막사에서 걸어 나와 벙커로 향했습니다. 부상은 의외로 경미했습니다. 고막 파열, 오른팔 부종, 왼팔의 멍과 찰과상, 얼굴의 작은 상처, 그리고 허벅지에 박힌 파편과 화상 정도였습니다.

일련의 우연들이 히틀러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회의가 원래 예정됐던 벙커가 아닌 목조 건물로 옮겨진 것, 폭탄이 무거운 테이블 다리 바로 뒤에 놓인 것, 계획했던 두 개의 폭발물 중 하나만 가방에 담긴 것, 활짝 열린 창문이 폭풍압을 밖으로 분산시킨 것 등이 그것입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향한 연설에서 이를 '신의 섭리(Providence)'라고 언급했습니다.

혹독한 보복과 발키리 작전의 좌초

히틀러는 줄곧 신뢰해 온 육군 지휘부의 배신에 격분했고, 끔찍한 복수를 결심합니다. 용의는 처음부터 사망한 슈타우펜베르크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한 하사가 노란색 서류가방을 든 팔 한쪽이 없는 대령이 막사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베를린의 음모자들은 초조함에 시달렸습니다. 명확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히틀러가 생존했는지, 슈타우펜베르크가 체포됐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발키리 작전, 즉 예비군을 동원해 나치 지도부와 친위대(SS), 게슈타포 등 히틀러 예하 조직을 무력화하는 계획을 개시해야 할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귀중한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결국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주요 음모자들은 즉각 체포되어 프롬(Fromm) 장군의 명령으로 총살당했습니다. 프롬은 자신이 초기에 음모에 가담했다는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이렇게 서둘러 처리한 것이 오히려 히틀러의 미움을 샀습니다.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1944년에만 5,764명이 체포되었고, 1945년에도 비슷한 규모의 검거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실제 계획의 전모를 알고 있던 사람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의 실패 (1944년 7월 20일)

그들은 누구를 대표했는가

음모자들이 누구를 대표했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처칠은 그들을 '가장 훌륭한 사람들 중 가장 용감한 자들'이라고 평가했지만, 영화 속에 그려지는 이상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독일 민족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민주주의를 경멸했습니다. 그에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거짓이었으며, 그는 자연스러운 위계 질서를 믿었기에 상등병 출신 히틀러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침공 당시 기갑사단 참모 장교로 복무하면서 폴란드인들을 '유대인과 혼혈인의 믿기 힘든 무리'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는 독일이 1939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유일한 출구는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장군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대령들이 움직여야 한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