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체제 거부, 국제연맹 탈퇴
히틀러가 권력 장악 직후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국제연맹(SDN) 탈퇴였습니다. 이는 베르사유 국제 질서에 대한 그의 거부 의사를 실천으로 보여준 상징적 행보였습니다. 사실 나치즘 초기부터 그는 독일 노동자당(DAP)의 25개조 강령과 저서 『나의 투쟁』에서 이러한 입장을 이미 분명히 밝힌 바 있었습니다.
자르 지역 주민투표와 독일 귀속
베르사유 조약은 자르(Saar) 지역을 15년간 국제연맹이 관리하도록 규정했으며, 그 기간 동안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금의 일부로 지불해야 하는 대가로 해당 지역의 석탄 광산을 채굴할 권리를 가졌습니다. 또한 1935년에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주민들이 국제 관리 하에 남을지, 아니면 독일로 돌아갈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1935년 1월 13일에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주민의 90.7%가 독일 편입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히틀러 정책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그는 곧바로 자르란트의 합병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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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군비 계획의 가속화
자르 성공 두 달 후인 1935년 3월부터 독일의 재군비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습니다. 괴링(Göring)은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투기를 실전 배치하겠다고 밝혔고(1935년 3월 10일), 같은 날 히틀러는 연설을 통해 징병제 도입과 36개 사단 규모 육군 창설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독일군 규모 제한과 군용 항공 보유 금지라는 베르사유 조약의 핵심 군사 조항이 정면으로 위반되었음에도, 프랑스와 영국은 아무런 실질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사 회담: 형식적 반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은 스트레사 회담(1935년 4월)에서 공동 대응을 모색했습니다. 이들은 로카르노 조약의 정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실과 독일의 팽창주의—특히 오스트리아 침공 가능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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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재무장: 무모한 도박
히틀러의 대응은 라인란트(라인 강 서쪽 지역)의 재무장이었습니다. 1936년 3월 7일, 약 3만 명의 독일 병사가 라인란트에 진입했습니다. 이로써 베르사유 체제가 만들어낸 방어 장벽이 소멸되었는데, 이 장벽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가 침략을 받을 경우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요할 경우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하기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결정은 상당히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열강들이 무력으로 대응하기로 한다면, 당시 독일은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참모본부는 히틀러에게 신중을 기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독일이 프랑스의 군사 개입에 저항할 수 없었으며, 그런 경우를 대비해 철수 계획까지 수립해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열강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고, 그 예측은 적중했습니다.
- 프랑스: 급진파 알베르 사로(A. Sarraut)가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습니다. 정부는 차기 총선을 앞두고 있었고 경제 위기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여론 역시 평화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의 약점은 동유럽 국가들과의 동맹 체제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 영국: 독일의 행동이 지니는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와 함께 공동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데 그쳤을 뿐 프랑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전쟁의 결과 이후 독일을 제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스트레사 전선이 끝까지 유지되었다면 독일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 열강들의 우유부단함은 무솔리니에게 히틀러에 맞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과와 역사적 의미
라인란트 재무장 이후 히틀러는 군부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크게 공고히 했으며, 서부 방어선인 지크프리트 선 건설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르누뱅(Renouvin)은 이 재무장이 아무런 응징 없이 통과되면서 역사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즉,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전'과 '이후'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