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역사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넬리아처럼 현모양처의 모범을 보인 인물도 있지만, 로마사를 가장 요란하게 장식한 것은 단연 '악녀' 유형의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들이었던 아그리피나와 메살리나를 꼽을 수 있습니다.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 역시 이러한 악녀 유형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받곤 합니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 정면으로 맞섰던 그녀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팔미라 제국의 등장

서기 260년, 중국에서 삼국시대가 한창이던 무렵 로마 역시 나라가 셋으로 갈라지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원인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 끝에 포로로 잡힌 것이었고, 이를 계기로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잇따랐습니다.
뒤를 이은 갈리에누스 황제는 상황 수습에 나섰지만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사산조 제국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때 무역 도시 팔미라의 실력자였던 오다이나투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자위군을 조직하자, 갈리에누스는 그를 동방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오다이나투스는 사산조 제국과의 싸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고, 페르시아의 수도 테시폰 공격까지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267년, 조카 마이오니우스에게 자신과 아들이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암살의 배후에는 오다이나투스의 두 번째 아내 제노비아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암살자 마이오니우스는 즉각 처형되었고, 팔미라의 왕위에는 제노비아의 아들 바발라투스가 앉았습니다. 제노비아는 스스로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여왕으로 군림했습니다.
제노비아의 지혜와 재능

제노비아는 상당히 교양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국어를 비롯해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이집트어에까지 능통했으며,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저작을 폭넓게 읽고 서평을 쓸 만큼 학식이 깊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남편이 사산조 제국과 싸울 때마다 곁에 따라가 전략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제노비아가 집권한 이후 팔미라 제국은 급속히 팽창했습니다. 그녀의 영토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부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뻗쳤습니다.
안티오키아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3대 도시로 꼽히던 곳입니다.
여기에 알렉산드리아마저 손에 넣으면서, 경제적 규모만 놓고 보면 팔미라 제국은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8세기의 저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제노비아를 "동방 최고의 여성 중 한 명"이라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녀는 끝까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후계자임을 선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의 대결, 그리고 몰락

탁월한 여왕이었던 제노비아의 운명은 로마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등장하면서 급격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로마 황제가 직접 팔미라 원정에 나서자, 제노비아는 사산조 제국과의 동맹으로 맞서려 했지만 이미 명분을 잃은 그녀의 군대는 돈으로 고용한 용병들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해도,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단련된 로마군의 위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믿고 의지하던 사산조 제국의 지원군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키아, 에메사, 팔미라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결전 끝에 제노비아는 결국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위의 그림은 포로가 된 제노비아를 묘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힌 제노비아는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탄원했고, 자신은 단지 장군들의 거짓에 속았을 뿐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로마는 이를 받아들여 팔미라의 주요 신하들을 처형했고, 팔미라의 왕인 제노비아의 아들 역시 죽였지만, 상징이 된 제노비아 본인만은 살려두었습니다.
황금 사슬 같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그녀는 로마에서 열린 개선식에서 만천하에 전시당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녀에게는 자신의 저택이 하사되었고, 원로원 의원과 재혼하여 자녀를 두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노비아는 세계사에서 가장 승리한 여성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