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단계 ⑥: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오스트리아 병합 시도가 한 차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이 나라를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1938년 2월 12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폰 슈슈니히를 베르히테스가덴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곳에서 히틀러는 그를 위협한 뒤,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외교 정책을 지지할 것과 오스트리아 나치즘의 수장인 아르투어 자이스-인콰르트를 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합의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무산된 국민투표
![]() |
빈으로 돌아온 폰 슈슈니히는 1938년 3월 9일,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사회적이고 기독교적인 오스트리아'라는 구호 아래 오스트리아의 독립 여부를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자이스-인콰르트는 히틀러의 뜻, 정확히는 명령이었던 국민투표 중단 요구를 전달했다. 국민투표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내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고, 결국 국민투표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저항 없는 점령, 안슐루스 선포
히틀러의 압박 끝에 자이스-인콰르트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직위에서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주를 요청했고,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오스트리아 전역을 점령했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 즉 안슐루스가 공식 선포되었다.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사명을 완수했다. 독일 민족의 총통이자 수상으로서 나는 역사에 보고한다. 우리 조국이 이제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음을.' — 히틀러, 빈에서의 연설(1938년 3월 14일)

![]() |
![]() |
열강들의 침묵
열강들은 히틀러의 이번 강수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저항할 경우 영국군조차 구원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는 깊은 내정 위기와 군사력 부족 속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일부 프랑스 정치인들은 안슐루스를 전쟁에 준하는 사태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침묵을 지켰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간의 우호 관계는 깨져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히틀러는 외교 카드를 미리 능숙하게 짜 두고 있었다. 루마니아와의 우호 조약 체결, 로마-베를린 축 구성 의정서 서명, 이탈리아·헝가리·만주국·스페인이 동참한 반공산권 협약(방공 협정) 체결, 그리고 무솔리니가 안슐루스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확약 확보까지. 결국 4월 2일, 서방 열강은 기정사실화된 병합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대독일'의 시작, 그리고 조작된 국민투표

안슐루스 발표는 독일 내에서 큰 환호 속에 받아들여졌다. 이는 '대독일(Großdeutschland)' 건설의 시작이자, 독일 제국주의가 발칸반도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출발점이었다. 히틀러의 인기는 정점에 달했다.
이번 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히틀러는 1938년 4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독일과의 통합 찬성이 99%를 넘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용된 투표용지(사진)를 보면, 이 투표가 얼마나 조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