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알프레드(Alfred the Great)가 기반을 다지고, 애설스탄(Æthelstan)이 왕국을 세웠으며, 에드거(Edgar)가 잉글랜드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에드거가 암살당한 뒤 왕위에 오른 것이 바로 훗날 '무계획왕(Unready)'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애설레드(Æthelred)였습니다.
별명 그대로 그는 분별력이 부족했고, 현자 회의(Witan)의 의견도 소홀히 여기면서 귀족들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져 갔습니다.
이 틈을 타고 데인인(덴마크인)들이 다시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애설레드는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의 누이 엠마(Emma)와 혼인하여 동맹을 맺고 맞서기로 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 땅은 게르민 계열의 잉글랜드 왕,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 그리고 데인인들 사이의 삼파전 양상으로 치닫게 됩니다.
삼파전의 시작
노르망디 공작과 동맹을 맺은 애설레드는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모든 데인인을 살해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데인인들은 옥스퍼드로 피신했지만, 성역으로 도피한 이들마저 가차 없이 공격받아 성소까지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덴마크 왕 스벤(Sweyn)은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공격해, 보복으로 옥스퍼드 시 전체를 불태웠습니다. 애설레드는 막대한 평화롭(데인겔드)을 지불하며 데인인들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 무능함에 분노한 잉글랜드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아내의 고향 노르망디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귀족들은 원수인 덴마크 왕 스벤을 잉글랜드 왕으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다음 해 스벤이 사망하자 장남 하랄(Harald)이 덴마크 왕이 되었고, 차남 크누트(Knut)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인공 크누트가 무대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두고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능한 왕의 대명사 같은 인물, 애설레드입니다.
노르망디 공작의 지원을 받은 애설레드는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왕위 탈환에 나섭니다.
이 소식을 접한 덴마크는 대군을 파병했고, 크누트는 군대를 직접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합니다.
그리고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애설레드는 최악의 타이밍에 세상을 떠납니다. 잉글랜드 역사상 두 번째로 무능한 군주로 존 왕과 애설레드가 꼽히는데, 나쁜 왕에게는 죽음의 타이밍조차 따라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애설레드의 뒤를 이은 것은 아들 에드먼드로, 에드먼드 2세로 즉위하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은 덴마크의 크누트를 환영했습니다.
에식스 전투에서 양측이 격돌했지만 크누트가 승리했고, 화평이 체결된 후 에드먼드 2세가 사망하자 현자 회의는 크누트를 정당한 잉글랜드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때 크누트는 자신이 에드거 왕의 뒤를 이었다고 선언하고, 선왕 애설레드의 미망인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딸인 엠마와의 혼인을 발표하며, 역사에 '데인 왕조'라 불릴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역사는 참으로 묘해서, 왕조를 살펴보면 외국 출신이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습니다. 명예혁명의 결과로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공작이 왕이 되었고, 현재 영국 왕실 역시 본래 독일 하노버 지방을 다스리던 하노버 왕조의 혈통입니다. 크누트는 어찌 보면 그 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해 제국의 건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는 '동군 연합(personal union)'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습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헝가리 왕을 겸임하는 식으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이를 극동에 적용하면 일본 천황께서 필리핀 국왕과 사모아 국왕을 겸하는 꼴이 됩니다.
유럽에서는 이처럼 여러 왕위와 황제위를 겸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크누트의 형인 덴마크 왕 하랄드 2세가 사망하자 크누트는 덴마크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즉 크누트는 잉글랜드 왕이자 덴마크 왕이 된 것입니다.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웨식스(Wessex), 머시아(Mercia), 노섬브리아(Northumbria),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의 넷으로 나누고, 백작(Earl)이라 불리는 귀족들에게 각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크누트가 이런 통치 형태를 채택한 이유는 덴마크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누트는 선제적으로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침공하기 시작해 노르웨이를 손쉽게 점령했고,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위까지 겸하게 됩니다.
그 결과 노르웨이·덴마크·잉글랜드가 하나로 연결되어 북해 무역을 통해 교역이 활발해졌고, 잉글랜드의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크누트는 외교에도 힘을 기울여 이탈리아까지 건너가 교황을 알현하고 신성로마황제 콘라트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잉글랜드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누트에 대한 평가
크누트 사후 7년 만에 데인 왕조는 멸망합니다.
백작(Earl)이라 불린 귀족들의 권력이 너무 커진 탓입니다. 특히 웨식스 백작 고드윈(Godwin)의 세력 확장이 두드러졌는데, 크누트 사후 그는 왕위에 앉힌 인물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전횡을 누렸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이 즉위하며 잉글랜드 왕위는 웨식스 왕가의 혈통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크누트라는 인물은 광대한 영토를 잘 다스린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덴마크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그에게는 잉글랜드보다 스칸디나비아의 덴마크가 더 중요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브리튼은 변방에 불과했고, 북해 제국의 광대한 영토 안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크누트가 잉글랜드 땅을 중시하고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면 영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외지 출신의 왕가는 통제하기 쉽습니다.
크누트 이후 영국 귀족들은 이 발상으로 국가를 운영하게 됩니다.
원래부터 브리튼은 귀족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크누트 이후 그 성격은 한층 짙어져 귀족들이 정치를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냈고, 오늘날에도 영국에는 귀족원(House of Lords)이 존재합니다.
이 무렵부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백작 작위가 오늘날까지 '얼(Earl)'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영국 귀족제의 뿌리가 이 시기에 얼마나 깊이 내려앉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이러한 철학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원할 정도인데, 미국으로 계승되어 흑인 노예제를 고착화시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더비 경(Lord Derby)이나 샌드위치 백작(Earl of Sandwich)처럼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며 귀족제가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역사란 만들기 어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