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발칸 전쟁 중 그리스 육군이 크레스나(Kresna)에서 불가리아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있을 무렵, 베니젤로스(Venizelos) 총리는 부쿠레슈티에서 강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열강,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의 압박 속에서 베니젤로스는 국왕이자 총사령관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에게 끊임없이 전보를 보내, 점령한 전선에 머물며 더 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위기가 터졌고, 베니젤로스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총리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그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화의 방법을 놓고 벌어진 대립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열강이 개입하기 전에 불가리아가 패배를 인정하는 즉각적인 그리스-불가리아 강화를 요구했다.
아울러 그는 그리스 육군이 북쪽으로는 추마기아(Tzoumagia)까지, 동쪽으로는 코모티니와 알렉산드루폴리까지 진격해 왔으므로, 카발라(Kavala)에 이르는 동부 마케도니아의 할양을 최소한의 영토적 '보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는 그리스의 영토 주장에 반발했다.
반면 독일은 이를 지지했다. 물론 그리스에 대한 순수한 호의 때문은 아니었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는 그리스가 독일의 무장 세력으로 기우는 것을 우려한 끝에 입장을 바꾸어 동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할양을 수용했다.
메탁사스의 제안, 국경의 9개 '방어' 요새
그리하여 그리스는 아이들의 피로써 불가리아인들에게 유린당했던 동부 마케도니아를 해방시켰고, 곧바로 그 방비에 착수했다. 충분한 재정이 없었기 때문에 이오아니스 메탁사스(Ioannis Metaxas) 중령의 제안에 따라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을 따라 9개의 '방어' 요새가 건설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루펠(Rupel) 요새였다.
이 이름뿐인 요새들은 당연히 1937~40년에 건설된 영구 요새 복합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제로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이고 참호로 보강된, 방어 능력이 극히 제한적인 소규모 폐쇄형 진영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도발' 규정과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분노
두 배로 늘어난 국토, 콘스탄티누스 국왕이 직접 이끈 군대의 연전연승, 그리고 독일 황제 빌헬름이 콘스탄티누스에게 원수 계급을 수여함으로써 이룩된 그리스 육군의 국제적 명성은 온 그리스에 걷잡을 수 없는 국민적 열광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쿠레슈티 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원수 서임은 프랑스에서 커다란 불만을 샀다.
실제로 1913년 9월 6일, 콘스탄티누스가 빌헬름의 공식 초청을 받아 베를린에 도착해 독일 육군 대규모 기동 훈련에 참석했을 때 일이 벌어졌다. 그가 "최근의 발칸 전쟁에서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했다"고 선언하자, 프랑스 여론은 분노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파리의 한 주요 신문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것은 단순한 왕실의 실언이 아니다. 꼼꼼히 저울질된 말들이며, 계획된 모욕이자 '독일 만세(Germany above all)'의 역설이다. 그가 할 가장 현명한 일은 독일 배를 타고 독일을 경유해 자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그가 파리를 방문할 때가 아니다."(콘스탄티누스는 프랑스에 나쁜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독일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에야 프랑스 수도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폐하. 다시는 뵙지 맙시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누스는 과감히 파리를 찾았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기울었던 여론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비록 분위기는 원만했지만, 프랑스 정치인들은 그의 의도를 끝내 확신하지 못하고 그를 의심스러운 인물로 여겼다. 황제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누이동생인 소피아(Sophia) 공주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만큼은 프랑스인들의 판단이 빗나갔다. 실제로 그들이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던 프로이센식 전술은 자신들의 전술보다 우월했으며, 그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전장에서 냉혹하게 드러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