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오노마르코스 장군, '비밀 무기'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다

오노마르코스 장군,  비밀 무기 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다

어떤 이들은 한때 유성처럼 눈부시게 빛나다가 역사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포키스인의 위대한 장군 오노마르코스도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무적'이라 불리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제3차 성전의 발발

기원전 356년, 이른바 제3차 성전(聖戰)이 일어나면서 그리스는 다시 한번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 전쟁의 뿌리는 테베와 포키스 간의 오랜 대립에 있었다. 결국 테베가 포키스를 암피크티온 평의회에 고발했고, 평의회는 포키스에 막대한 벌금을 부과했다.

벌금을 낼 능력이 없었던 포키스인들은 필로멜로스 장군의 설득에 따라 델포이를 점령해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고, 스파르타·아테네·페라이의 참주와 동맹을 맺어 델포이 신역을 요새화했다.

그러나 티토레아 근교 전투에서 필로멜로스가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동생 오노마르코스는 군대 일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형의 죽음 이후 그가 직접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오노마르코스는 형보다 더 과감하고 역동적인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적이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던 그는 마침내 결정적인 선을 넘기로 결심한다.

신전의 보물과 '포병' 부대의 탄생

그는 델포이 신전의 보물을 '빌려왔고'(사실상 강탈이었다), 그 자금으로 숙련된 용병들을 대거 모집해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특히 투석기 운용에 훈련된 장인과 병사들을 규합해 그리스 본토 최초의 강력한 '포병' 부대를 창설했다. 나아가 테살리아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적대 연합에서 이탈시키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기원전 353년, 오노마르코스는 로크리스를 침공해 스로니온과 암피사를 함락시켰고, 오늘날 그라비아 일대에 해당하는 도리스 사중주(테트라폴리스) 지역을 유린했다. 이어 보이오티아인들을 공격해 오르코메노스를 점령하고 카이로네이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압박받던 페라이의 참주 리코프론이 구원을 요청하면서 그는 공성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어쩌면 오노마르코스의 치명적 실수였다. 북방 그리스의 강대국 마케도니아를 적진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동생 파일로스에게 7,000명의 병력을 주어 테살리아의 리코프론을 지원하게 했으나, 파일로스는 마케도니아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무적 팔랑크스를 꺾은 승리

결국 오노마르코스는 친히 필리포스를 상대로 원정하기로 결심한다. 기원전 353년, 그는 보병 20,000명, 기병 1,000명, 그리고 다수의 투석기를 이끌고 테살리아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의 정확한 구성이나 투석기의 종류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아마도 경장 가스트라페테스(궁석기)와 창병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무기로 무장한 그는 연이은 두 번의 전투(펠라스기오티스 제2·제3차 전투, 아마도 페라이 인근)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투석기야말로 사리사 창병 팔랑크스라면 무적이라 여겨졌던 적을 꺾게 해준 승리의 열쇠였다. 그의 군대에는 호플리테스와 펠타스트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밀집 대형을 이룬 팔랑크스 병사들이 투석기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두 명씩 쓰러져 갔다고 전해진다.

필리포스는 굴욕을 안고 물러났고, 오노마르코스는 이 승리들로 그리스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승기를 살리지 못하고 보이오티아로 돌아가 코로네이아를 정복하는 데 머물렀다. 한편 필리포스는 테살리아인들의 지원과 그들의 유명한 기병대를 확보한 뒤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오노마르코스는 운명의 전장에서 그를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진군했다.

크로키온 평원, 기원전 352년

운명을 가른 결정적 전투는 이른바 크로키온 평원에서 벌어졌다. 오노마르코스는 아테네와 테살리아 동맹군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병력만으로 필리포스의 대군과 맞서야 했다. 이번에는 필리포스가 지난 실패의 교훈을 삼아 무모한 정면 돌파 대신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월한 기병대를 전장에 집중 투입했다.

양측 모두 보병 20,000명을 보유했지만, 기병은 필리포스가 정예 3,000명을 거느린 반면 오노마르코스는 겨우 500명에 불과했다. 결국 포키스 기병대는 패배했고, 마케도니아군은 적을 측면에서 압도해 완전히 분쇄했다. 전투는 알미로스 인근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는 카리스 장군 휘하의 함대를 급파해 포키스군과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아테네군은 오노마르코스 군의 패잔병들과 뒤섞여 혼란에 빠졌고,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함선으로 되돌아갔다.

몰락한 영웅의 최후

오노마르코스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최소 6,000명이 전장에서 쓰러졌고, 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오노마르코스의 최후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고대 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아테네 선박에 도달하려다 익사했다고 기술했다. 반면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는 그가 필리포스에게 포로로 잡혀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그가 자기 부하들의 손에 죽었으며, 필리포스가 그의 시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신성 모독죄로 간주된 3,000명의 포로들을 물에 빠뜨려 처형했다고 기록했다.

어느 쪽이든 포키스인들은 기원전 346년까지 전쟁을 계속 이어갔지만, 아테네 동맹의 지원마저 끊기자 결국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필리포스는 크로키온 평원에서의 승리를 특별히 기념했다. 바로 그 시기에 딸 테살로니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