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벨리사리우스의 걸작: 트리카마룸 강변 전투에서 반달족을 완전히 궤멸시키다

벨리사리우스의 걸작: 트리카마룸 강변 전투에서 반달족을 완전히 궤멸시키다

아드 데키무스 전투에서 패한 반달족 국왕 겔리메르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서쪽 마우레타니아 방면으로 물러났다. 군의 사기는 이미 바닥에 닿아 있었다. 벨리사리우스 휘하의 장군 요안니스가 이끄는 소수의 부켈라리우스(비잔틴 정예 기병)가 수도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몰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카르타고를 포기한 순간, 겔리메르는 사실상 전쟁의 지속마저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정비된 반달군과 벨리사리우스의 대응

겔리메르가 불리스 평원에서 잔여 병력을 규합하고 무어인들에게 참전을 호소하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개선 행진을 벌이며 카르타고에 입성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달군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불리스 평원에서 왕과 함께 무패를 유지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겔리메르의 동생 자존(차존)이 이끄는 5,000명의 정예 부대로 증원되었기 때문이다.

세력을 회복한 겔리메르는 잃어버린 수도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다음 날, 작전을 마친 반달군은 카르타고 서쪽 30km 지점 트리카마룸 일대의 작은 강 앞, 진영 밖에 대열을 세웠다. 반달족의 배치를 확인한 벨리사리우스 역시 군대를 맞서 배치했다.

비잔틴군은 두 개의 전열로 편성되었다. 첫 번째 전열은 오로지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넓게 펼쳐진 적 전선 전체를 커버할 수 있도록 산개 배치되었다. 그 뒤에는 보병 전체와 500명의 부켈라리우스가 배치되었으며, 이들은 벨리사리우스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병력은 약 8,000명에 불과했지만, 반달군은 그 두 배에 달했고 여기에 수천 명의 무어인까지 합류해 있었다. 다만 무어인들은 결국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다.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와 교묘한 전술

서기 533년 12월 15일. 갑자기 벨리사리우스는 기병 지휘관 요안니스에게 적 중앙 공격을 명령했다. 목표는 반달족이 장악한 강 건너편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요안니스는 소수 병력만을 투입해 적을 깊이 붙잡아 두지 않았다. 반달족의 반격을 받자 비잔틴 기병들은 곧바로 후퇴해 강을 건너 원래 진영 쪽으로 되돌아갔다. 자존이 이끄는 반달군은 이들을 자기 진영 강가까지 추격했다. 거기서 추격을 멈춘 그들은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통해 적이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태세를 고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요안니스에게 적 중앙을 향해 연속적으로 공격하되, 대규모 접전을 벌이지 말고 압박당하면 후퇴한 직후 즉시 다시 개입하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는 모든 부켈라리우스의 지원을 받아 장군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공격이 거듭될수록 위력과 기세는 한층 강해졌다. 비잔틴 기병의 화살을 맞아낸 반달족은 일대일 백병전을 벌이려고 접근했고, 그때마다 더 중무장을 갖춘 부켈라리우스들이 나서 주저 없이 반달족과 맞붙었다.

결국 크게 압박당한 요안니스는 다시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몇 분 만에 비잔틴 기병은 재차 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부켈라리우스들이 선두에 섰고, 제2열을 이룬 기병들의 화살과 제3열 보병의 지원이 뒤따랐다. 이 합동 공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반달군 전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벨리사리우스는 전군에 총공격을 명령했다. 바로 그 순간 한 명의 부켈라리우스가 자존을 쓰러뜨렸다. 동생의 시신을 본 겔리메르는 황급히 도주했다.

붕괴, 그리고 압도적인 승리

지휘관을 잃고 비잔틴군 전체의 압박을 받은 반달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동맹국인 무어인들도 전선이 붕괴하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그동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훈족들은 승리를 거듭하는 벨리사리우스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히려 분노처럼 반달족에게 덮쳤다. 사기가 바닥난 반달족은 진영 안으로 숨어들어 800명의 전사자를 애도했다.

비잔틴군의 손실은 단 50명에 불과했다. 전투는 벨리사리우스의 또 한 번의 값진 승리로 끝났다. 그의 승리는 피해 규모 때문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반달족은 동맹 없이도 여전히 비잔틴군보다 수적으로 많았다. 벨리사리우스가 꺾어놓은 것은 그들의 사기와 저항 의지였고, 그것이야말로 반달족에게 가장 치명적인 결과였다.

이윽고 벨리사리우스는 적 진영 점령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반달족은 더 이상 진영을 사수하지 않았다. 왕을 따르던 그들은 다가오는 비잔틴 방진의 모습에 벌벌 떨며 무질서하게 도주했다. 몇 달 뒤, 겔리메르 역시 포로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