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는 그리스 정복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 계획은 1단계에서 에피루스(Epirus)와 코르푸(Corfu)를 기습 점령하고, 2단계에서 서마케도니아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끊임없는 도발과 온 유럽을 뒤흔든 국제 정세에 직면한 그리스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방어 계획의 수립
이탈리아의 위협을 반영한 그리스 최초의 방어 계획은 1939년에 작성되었습니다(계획 IB). 이 계획은 아라크토스(Arachthos) 강까지 에피루스 일부를 내주고 아라크토스–지고스메초보(Zygos Metsovo) 선에서 방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방어 태세가 순조롭게 갖춰지자 영토 할양 없이 국경에서 막겠다는 제2의 계획(IBa)이 수립되었는데, 여기에는 칼라마스(Kalamas) – 엘라이아(Elia, 칼파키) – 가밀라(Gamila) – 스몰리카스(Smolikas) – 스타브로스(Stavros, 그람모스)로 이어지는 전진 방어선이 담겼습니다.
기습 침공에 맞선 제8사단의 대비
이탈리아의 계획은 그리스군의 동원과 집결이 끝나기도 전에 신속 기동 부대로 기습 침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방어의 무거운 짐은 에피루스 전선, 곧 요아니나(Ioannina)의 제8사단이 떠안게 되었습니다. 사단장 하랄람보스 카치미트로스(Charalambos Katsimitros) 소장의 주도로 엘라이아(칼파키) 지역에 방어 준비를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곳을 장악하면 에피루스뿐 아니라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로 통하는 관문까지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지는 1939년 중반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구축되었으며, 특히 칼라마스 강 도하지점 양쪽의 고지가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1940년 10월 27일, 전쟁 발발 하루 전, 제8사단은 동원을 마쳤고 사단장은 참모본부(GES)에 "이탈리아인들은 칼파키를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양측의 전력 비교
제8사단은 제3보병여단 사령부와 일부 보병·포병 부대로 증강되어 보병연대 사령부 4개, 보병대대 15개, 포병중대 15개, 보병 호위소대 5개, 기관총 대대 2개, 사단 정찰대 1개를 보유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군은 전차와 항공 지원(약 400대)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에피루스 방면에는 제25군단 산하 4개 사단, 즉 제23보병사단 '페라라(Ferrara)', 제131기갑사단 '켄타우리(Centauri)', 제51사단 '시에나(Siena)', 그리고 기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보병대대 21개, 베르사글리에리 대대 1개, 포병중대 41개, 박격포 대대 2개, 기병연대 3개, 전차 90대, 총 병력 약 41,200명).
전쟁의 시작: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이 만료되기도 전인 1940년 10월 28일 새벽, 이탈리아군은 에피루스 전선 전역을 따라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이오안nis 메탁사스 총리가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에 '거부(오히)'라고 답한 것은 바로 전날 밤의 일로, 이날은 지금도 그리스의 국경일 '오히 데이(Ohi Day)'로 기념됩니다.
그리스 전위 부대들은 저항한 뒤 계획대로 칼파키 지역으로 물러났는데, 제8사단 사령부가 바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1월 1일까지 이탈리아군은 지상·항공 정찰에 머물렀고, 포병과 공군이 그라발라(Grabala), 칼파키, 아소니사(Assonisa) 고지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1월 2일, 조직적인 공격 개시
조직적인 공격은 11월 2일 오전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 항공기는 차례로 그라발라, 칼파키, 벨라스(Vellas) 수도원, 요아니나 비행장, 마자라키(Mazaraki) 다리를 폭격했지만 또다시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정오에는 이탈리아 포병의 대규모 포격이 이어졌습니다. 2,000발이 넘는 포탄이 쏟아져 고지대가 문자 그대로 파헤쳐졌음에도 그리스군의 치밀한 진지 구축 덕분에 피해는 미미했습니다.
그라발라 고지를 둘러싼 공방
'페라라'와 '켄타우리' 두 사단이 그라발라와 프실로라키(Psilorrachis) 고지를 향해 감행한 공격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그리스 포병의 성공적인 활약으로 이탈리아군은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알바니아인 대대 하나와 이탈리아 정예 부대가 기습으로 그라발라 고지를 탈취하고 그곳의 제15연대 중대를 몰아냈습니다. 이어진 강설 폭풍우로 양측 모두 추가 작전이 어려워졌지만, 11월 3일 새벽까지 그리스군은 고지를 되찾았습니다. 이탈리아군은 그라발라에 전사자 20명, 포로 6명과 수많은 무기와 탄약을 남겨두고 물러났습니다.
하루 종일 양측은 포격을 주고받았고, 이탈리아 공군은 칼파키와 수데나(Sudena)를 폭격했습니다. 오후에는 이탈리아군이 그라발라, 프실로라키, 아소니사 고지에 새로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켄타우리' 사단의 전차 70~80대가 약 50명의 오토바이 병력의 측방 엄호를 받으며 칼파키에서 500~600m 거리까지 접근했습니다.
전차 돌파의 좌절과 사기 진작
그러나 이 공격은 그리스 포병과 대전차 방어(참호와 지뢰지대)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차 다수가 파괴되었고 나머지도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습니다. 이날 그리스군의 손실은 장교와 병사를 합쳐 사상자 35명이었습니다. 적의 실패는 그리스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습니다. 처음 보는 전차와 공군이라는 이탈리아의 두 가지 우위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연이은 실패 끝에 이탈리아군은 예정했던 전면 공격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그라발라를 향한 포격과 공습에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후퇴
11월 5일 오전, 이탈리아군은 그라발라와 브론티스메네(Vrontismene) 지역을 폭격했지만, 사실 전날 밤 사이 제8사단은 들키지 않게 진지를 이미 철수한 뒤였습니다. 동시에 이탈리아 전차들은 칼라마스 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늪지대에 빠져 실패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산발적인 교전이 이어졌고, 11월 7일 이탈리아군의 마지막 총공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칼파키 요충지를 우회해 요아니나로 진출하려 했고, 같은 진지들을 포격한 뒤 일시적으로 그라발라를 점령했지만, 결국 고지는 그리스 손에 남았습니다. 제15보병연대 부대들이 가슴에 '죽음의 병사'라는 문구가 새겨진 금속 휘장을 단 이탈리아 전위 부대를 섬멸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군의 손실은 전사 45명, 포로 7명이었고, 그리스군은 장교 1명 전사·1명 부상, 병사 11명 전사·33명 부상을 입었습니다. 11월 8일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완전히 멎었고, 알바니아 주둔 이탈리아군 사령관 프라스카(Visconti Prasca) 장군은 소드두(Soddu) 장군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전 전선에 걸쳐 방어하며 후퇴하기 시작했고, 칼라마스 강 남쪽의 단 하나의 교두보만을 유지했습니다.
출처: DIS/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