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크레타 전투: 영웅주의의 영광과 증언

크레타 전투: 영웅주의의 영광과 증언

크레타 전투란?

크레타 전투는 1941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을 가리킨다.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 정부의 동의에 따라 크레타의 방위 책임은 영국이 인수하게 되었다. 이는 섬이 지닌 지리적 위치와 중동 지역 영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당시 크레타에 주둔하던 그리스 제5사단은 소집되어 그리스 본토로 이동했고, 알바니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준비 부족 속의 방어 태세

1941년 4월 말, 그리스 본토 대부분이 이미 추축국 군대에 점령된 상황에서 크레타 주둔 영국-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권은 제2뉴질랜드 사단장 버나드 프리버그(Freyberg) 소장에게 넘어갔다.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되었음에도 섬 방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수립되지 않았고, 침공 대비 역시 거의 진척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본토에서 이송된 병력으로 보강된 크레타의 총 병력은 약 11,500명의 그리스군과 31,500명의 영국군이었으나, 장비 면에서 심각한 부족에 시달렸다. 무기와 탄약 등 보급품은 허용 가능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고, 섬에는 공군이 전혀 없었으며 보유한 포와 전차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프리버그 소장은 상황을 분석한 뒤 중동 최고사령관에게 무기, 탄약과 각종 보급품의 즉각적인 반입과 함께 공중·해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적 공군의 활동으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 물자의 절반조차 도착하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

방어 배치와 히틀러의 계획

크레타의 군사력은 섬 내 전략 요충지의 중요성과 취약성에 따라 말레메, 칸디아(하니아), 레티므논, 헤라클리온 등 4개 방어 구역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섬을 방어하고 적이 공항과 항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이 그리스에 대한 의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한참 전부터 크레타 문제로 고심해 왔다. 그는 크레타를 점령하면 동부 지중해에서 신속한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섬 공격은 정예 낙하산 부대를 동원한 공수 작전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5일 '헤르메스(Hermes)'라는 코드명의 제28호 총지침이 하달되며 크레타 점령 작전이 공식화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에 투입될 총 병력은 22,750명, 항공기 1,370대, 선박 70척에 달했다. 작전은 소수의 이탈리아 구축함과 어뢰정의 지원을 받았으며, 무솔리니의 요청에 따라 도데카니사 제도에서 파견된 강화 연대가 섬 동부 해안에 상륙하기로 했다. 다만 이 상륙 작전은 결국 5월 말, 섬의 운명이 이미 기울어진 뒤에야 실행되었다.

5월 20일, 공수 침공 개시

독일군의 크레타 공습은 5월 20일 오전 시작되었다. 격렬한 폭격에 이어 수많은 수송기 편대가 칸디아-말레메 일대에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글라이더를 이용한 공수 부대의 착륙도 진행되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타브로니티스 강 동쪽에 작은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말레메 공항과 제107 고지—제2뉴질랜드 사단의 생명선—에 화망을 집중시켰다. 결국 영국군은 5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 사이 제107 고지를 포기하고 남동쪽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레티므논과 헤라클리온 지역에서도 독일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 지역의 독일 낙하산 부대는 처참한 피해를 입으며 어떤 전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프리버그 소장은 제5뉴질랜드 여단장에게 상황 보고를 제때 받지 못해 말레메 구역의 위기를 인지하지 못했고, 만회에 나서기엔 너무 늦었다. 결국 5월 22일 새벽 3시 30분 말레메 공항과 제107 고지 탈환을 위해 발동한 역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패색이 짙어진 전선

역습 실패 이후 독일군은 끊임없이 증원되며 북동쪽으로 진격했고, 영국-그리스 연합군은 5월 23일 밤부터 24일 새벽 사이 더 동쪽의 새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이날부터 작전 주도권은 완전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고, 섬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섬 주민들이 직접 참여한 저항은 5월 29일 영국군이 철수를 시작할 때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다. 영국군 대부분의 철수는 5월 31일 밤 11시 20분에 완료되었으며, 섬에 남겨진 영국군과 그리스 부대는 독일군에 항복하거나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이후 중동으로 탈출했다.

에베피돈 육군사관학교의 활약

그리스 육군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에베피돈(Evelpidon)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자발적 참전이다. 1학년 생도 약 300명 전원이 장교들과 함께 남부 그리스를 횡단해 1941년 4월 29일 유류 운반 차량을 타고 칸디아 지역 콜림바리에 도착했다. 루카스 키토스(Loukas Kitsos) 중령이 지휘하는 사관학교는 칸디아 육군부 직속으로 편성되어 고니아 수도원과 콜림바리 마을 사이 지역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작전 첫날, 사관학교 대대는 곧바로 실전의 세례를 받았다. 독일 제2돌격대대의 연이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그러나 전력 손실과 탄약 부족으로 인해 사관학교는 5월 20일 밤부터 21일 새벽 사이 델리아나 지역으로 후퇴해 방어 태세를 재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칸디아 함락 후 사관학교는 중동으로 빠져나가 전투를 계속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백산(白山)으로 이동했다. 험준한 백산 능선을 넘는 행군은 8일간 이어졌다. 스파키아 인근에 도착하자 사관학교장은 생도들을 소집해 크레타를 떠날 배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정부 지침에 따라 이 시점부터 사관학교가 해산됨을 선포했다. 생도들은 학교의 군기를 안전한 곳에 숨긴 뒤 엠브로스네로-아스키푸 일대로 흩어졌다.

'독일 낙하산 부대의 무덤'

1941년 6월 1일, 열흘이 넘는 격전 끝에 크레타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영국-그리스 연합군의 용맹한 싸움과 영웅적인 크레타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크레타인들의 용기와 자기희생 정신은 그리스인은 물론 모든 연합국의 깊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 승리의 대가는 너무나 처참해서, 종전까지 독일은 결코 같은 형태의 공수 작전을 다시 감행하지 못했다. 크레타는 독일 제11항공군단장 쿠르트 슈투덴트(Student) 중장이 고백했듯이, 문자 그대로 "독일 낙하산 부대의 무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