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간 이어진 미국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혈이 많은 전쟁이었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한때 번영을 누리던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으며, 남부 전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높은 대가 끝에 국가의 통합과 노예제 폐지라는 거대한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남북전쟁의 배경부터 종말과 여파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독립, 갈등의 씨앗
1773년,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주민들은 런던 정부가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세금에 반발해 들고일어섰고, 이 시위는 곧 시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을 건국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미국은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합니다. 영국군은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자유를 향한 싸움은 7년간 이어졌고 결국 영국은 패배했습니다.
1788년 미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개별 주에 주권을 부여하는 연방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문제는 노예제 찬반 여부 역시 각 주 정부의 결정에 맡겨졌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큰 행운을 꿈꾸며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19세기 중반 미국은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지만 국경 안쪽에서는 커다란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노예제, 찬성이냐 반대냐
당시 북부 주에는 약 2천만 명이, 남부 주에는 약 700만 명이 거주했습니다. 북부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며 진보적 성향이 강했고, 남부는 농업이 경제를 지배하는 보수적 사회였습니다.
남부의 부유한 지주들은 주로 목화 재배와 수출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값싼 노동력이 없었다면 대규모 농장을 수익 있게 운영하기 어려웠기에, 노예제는 남부 경제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남부 주의 노예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목화밭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반면 북부에서는 노예제가 이미 폐지되어 현대 사회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북부는 강력한 정치적 압박을 통해 남부에서도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노예 노동을 포기하는 순간 남부 농장주들은 경제적 몰락을 각오해야 했기에 양측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링컨의 대통령 취임, 전쟁의 도화선
미국 상원에서는 노예 문제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남부에서는 연방 탈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갔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자 노예제 반대자였던 인물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860년 11월, 링컨이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에는 즉각적인 정치적 파장이 일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같은 해 12월 연방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1861년 2월, 6개 노예주 대표들이 모여 '미국 남부연합' 결성을 결의했고, 이후 다른 5개 주가 잇달아 연합에 가담했습니다.
전쟁의 시작, 섬터 요새 포격
버지니아주 리치몬드가 남부연합의 수도가 되었고, 제퍼슨 데이비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탈퇴한 주들은 연방 헌법과 대체로 유사한 헌법을 제정했으나, 노예 소유권은 명시적으로 보호했습니다.
이윽고 남부에서는 군사 시설을 포함한 연방 재산 몰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에 위치한 섬터 요새(Fort Sumter)의 연방 수비대는 남부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은 포격을 개시해 요새를 점령했고, 이 군사 행동은 미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유혈난무한 전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분열된 미국의 모습
섬터 요새 함락 후 링컨은 75,000명의 자원병 부대를 이끌고 남진하며 빠른 승리로 반군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부는 이미 군사적 대결을 준비한 상태였습니다. 남부군은 사기 높은 병력뿐 아니라 더 잘 훈련된 장교단을 보유하고 있었고, 덕분에 남북전쟁 초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전세는 곧 북부에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합니다.
기술이 판을 짠 전쟁
초기 패배 이후 링컨은 전쟁 체계를 전면 가동했습니다. 새로운 병력이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아 최전선에 투입되었고, 북부의 강력한 군수 산업은 군대에 물자와 신형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습니다. 특히 철도는 병력과 보급 수송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전장에 남은 전사자들
남부는 더 이상 북부의 기술 우위에 맞설 수단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연방군의 해상 봉쇄로 남부연합의 보급선이 차단되었습니다. 연방군이 미시시피 강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보급 동맥까지 장악하자 남부의 패배는 불가피해졌습니다.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쥡니다.
절멸로 치닫는 전쟁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하고 무자비해졌습니다. 전통적인 일대일 전투는 최신 기술이 동원되는 '철의 전쟁'으로 변모했습니다.
미시시피 강 장악을 위해 양측은 장갑 포탑함을 개발했고, 잠수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무기도 실전에 사용되었습니다. 민간인 피해조차 의도적으로 감수되었습니다. 북부군이 남부 영토를 통과하며 밀어붙인 파괴의 벨트는 거의 100km에 달했고, 사람과 가축이 죽고 농장이 불탔으며 애틀랜타와 찰스턴 같은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승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절멸전이 된 것입니다.

연방군에 의해 파괴된 찰스턴
종말과 여파
남부는 마침내 피바다를 맞았습니다. 마지막 결정적 전투는 남부연합의 수도 주변에서 벌어졌습니다. 연방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리치몬드로 진격해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은 1865년 4월 9일 항복을 결정했고, 이로써 전쟁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결국 6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파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1864년 재선에 성공한 링컨은 연방을 지켜냈지만, 남북 주 간의 증오를 극복하지 못한 채 1865년 4월 15일 남부 광신도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남부 광신도 부스가 링컨을 저격했다
연방의 모든 주에서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링컨의 목표는 그가 서거한 직후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부 주들이 전쟁의 여파에서 경제적으로 회복하고 동등한 사회·정치적 권리를 지닌 채 연방에 재합류하기까지는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전쟁 직후에는 인종차별적 비밀결사 단체 Ku Klux Klan(KKK)이 결성되었습니다. KKK 회원들은 남부의 패배로 이득을 취하려던 북부 기업가들에게 조치를 취했고, 남부에서 정치적 직책을 맡은 전 노예 출신 인사들을 표적 삼아 사냥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주 사이에는 오늘날까지도 뚜렷한 격차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