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탐험가 레이프 에릭손이 이끈 바이킹들은 오늘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서기 1000년경, 그린란드에 정착한 아이슬란드인들이 북아메리카 해안에 접근해 그들이 마주한 땅을 '빈란드(Vinland)'라 명명했습니다. 이 사실은 '적색 에릭의 사가'와 '그린란드인의 사가'라는 두 사가에 기록되어 있으며, 캐나다에서의 최근 고고학적 발견들이 이 이야기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고고학적 연구

1960년, 안네 스틴 잉스타드와 그녀의 남편 헬게 잉스타드는 뉴펀들랜드 섬 북단에서 랑스 오 메도(L'Anse aux Meadows) 유적지를 발견했습니다. 일곱 차례의 발굴 작업을 통해 이탄 벽으로 된 여섯 채의 집터, 두 채의 땅속 집(그 중 하나는 대장간 터 포함), 네 채의 선박 보관소, 두 개의 취사 구덩이가 드러났습니다. 이 유적군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정착지와 유사한 북유럽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비누석 방추차, 뼈 바늘, 청동 핀, 선박 건조용 못 다수)은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서기 100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랑스 오 메도 유적지는 사가들에 기록된 북유럽인의 아메리카 정착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최근에는 훨씬 남쪽에 두 번째 유적지가 확인되었습니다. 뉴펀들랜드 끝자락,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 근처의 포인트 로지(Point Rosée)인데, 이곳은 선박 정박에 적합한 두 개의 만 인근에 위치합니다. 2015년 6월, 앨라배마 대학의 연구자 사라 파르카크가 위성 탐사 기술을 이용해 바이킹 건물로 보이는 토성(土城) 흔적을 포착했습니다. 이 기술로 그녀는 이미 고대 이집트와 로마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으며, 그에 따른 상도 수상했습니다.

이후 발굴에서 풀벽으로 둘러싸인 화덕, 목탄, 철 찌꺼기, 이탄이 혼합된 흔적, 즉 바이킹들에게 흔한 제련용 화덕 자취가 드러났습니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흔적들은 서기 1000~13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적색 에릭의 사가'와 '그린란드인의 사가' 두 사가는 바이킹의 아메리카 항해, 특히 레이프 에릭손의 발견을 전합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가진 유일한 자료이나, 그 성격상 기록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서로 내용 차이도 큽니다. 그러나 랑스 오 메도 유적지의 발견, 그리고 포인트 로지 유적지의 가능성이 더해지면서 사가의 기록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린란드인의 사가' 속 레이프 에릭손

레이프 에릭손은 970년경, 아마도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적색 에릭'(에이리크 토르발드손)의 아들로,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랑스러운 바이킹이었고 어머니는 토드힐드였습니다. 본래 노르웨이 출신인 에릭은 아버지 토르발드 아스발드손이 살인죄로 추방당하자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자랐습니다. 성인이 된 에릭 역시 아버지와 같은 이유로 아이슬란드에서 3년간 추방당합니다. 그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해, 바다에서 길을 잃은 동포들이 묘사했던 땅들을 찾아 나섰고, 그렇게 그린란드 해안에 닿아 얼음 없는 푸른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3년이 지나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그는 500명의 동포를 설득해 자신이 탐험하고 '그린란드(푸른 땅)'라 명명한 땅으로 이주시킵니다. "이 나라에 아름다운 이름이 있으면 사람들이 정말 가고 싶어 할 것"이라며(적색 에릭의 사가 2장). 21척의 배가 떠났으나 케이프 페어웰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14척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난류(멕시코만류)와 한류(그린란드 해류)가 만나 파랑과 안개가 심했습니다. 이주민들은 '서부 정착지'와 '동부 정착지' 두 곳을 건설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에서 자라며 아버지가 유력한 정착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986년경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가던 중 서쪽으로 표류한 동포 비아르니 헤르욜프손이 목격한 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5명의 동료와 함께 탐험에 나선 레이프는 동부 정착지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먼저 빙하로 뒤덮인 땅을 만나 '헬룰란드(편평한 돌의 땅)'라 명명했고, 더 남쪽으로 가니 모래 해변 뒤로 높은 나무들이 솟은 땅이 나왔습니다. 이를 '마르클란드(숲의 땅)'라 불렀습니다.

비아르니는 노르웨이로 가서 에릭 백작을 알현했고, 미지의 땅을 보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 땅들을 더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으나, 그는 백작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여름 그린란드로 돌아온 그는 발견담을 널리 알렸고, 브라타할리드의 '적색 에릭'의 아들 레이프가 그를 찾아가 배를 사들였습니다. 35명의 동행을 꾸린 레이프는 아버지에게 원정대를 이끌어달라 청했고, 에릭은 나이 탓에 사양하다가 아들의 간청에 못 이겨 승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비틀거리며 에릭이 떨어져 발을 다치자, "내 운명에는 이 땅 외에 다른 땅을 발견하는 것이 없나 보다"라며 돌아가고, 레이프만 일행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튀르케르라는 별명의 사내도 있었습니다.

항해 끝에 비아르니가 보았던 땅에 닿았습니다. 해안과 내륙의 빙하 사이에는 자갈만 깔려 있고 풀 한 포기 없으며 어떤 편의도 없는 황무지였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비아르니처럼 이 땅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름을 붙여주마. 헬룰란드(바위 땅)라 부르리라."(그린란드인의 사가, 레마클 번역)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레이프 에릭손은 해안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며 쾌적한 땅을 발견합니다. 공기는 온화하고 강에는 연어가 가득하며, 낮이 그린란드보다 깁니다. 야생 포도나무가 자라는 이 땅을 '빈란드(포도의 땅)'라 불렀습니다. 레이프와 일행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레이프스뷔디르(레이프의 막사)'라 불리는 곳에 집을 짓고, 경비조와 탐사조로 나누어 몇 달간 지내며 목재를 베고 포도를 수확한 뒤 그린란드로 돌아갔습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맛보니 지금까지 알던 어떤 것보다 달콤했습니다. 다시 배에 올라 섬과 북쪽으로 뻗은 곶 사이의 좁은 해협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물이 얕아 썰물 때 배가 바닥에 닿았지만, 그들은 밀물을 기다릴 겨를도 없이 강 어귀로 상륙했습니다. 밀물이 되자 배로 돌아가 강과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 정박하고 짐을 내려 오두막을 지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겨울을 나기 위해 큰 집을 지었습니다. 강과 호수에는 본 적 없는 거대한 연어가 넘쳐났습니다. 기후가 온화해 겨울에도 가축을 외양간에 먹일 필요가 없었고, 서리는 거의 내리지 않으며 풀도 거의 시들지 않았습니다. 최단일에도 해가 7시 반에 뜨고 4시 반에 지는 등,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보다 낮과 밤의 길이 차이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린란드인의 사가, 레마클 번역)

레이프 에릭손의 항해들

이후 추가 원정들이 이어집니다. 이듬해 레이프의 동생 토르스발드르가 새로운 항해에 나서 레이프의 막사에서 두 번 겨울을 났으나,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고 동료들은 그린란드로 돌아갔습니다. 1년 뒤 적색 에릭의 또 다른 아들 토르슈타인이 항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토르슈타인의 미망인과 재혼한 토르핀 칼세브니가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영구 정착을 목표로 항해했습니다. 두 번째 겨울, 원주민과의 충돌 끝에 정착지는 포기되고 모두 그린란드로 철수했습니다.

'적색 에릭의 사가'에서는 레이프 에릭손이 비아르니 헤르욜프손의 역할을 겸해, 노르웨이에서 그린란드로 돌아가던 중 표류해 아메리카 땅을 목격합니다. 헬룰란드, 마르클란드, 빈란드의 지명을 확정한 항해는 토르핀 칼세브니가 주도합니다. 북쪽의 겨울 거처 스트라움피오르드(Straumfjord)와 남쪽의 여름 캠프 홉(Hóp) 두 기지가 만들어지며, 홉에서는 두 달간 목재와 포도를 수확했습니다. '그린란드인의 사가'에 나오는 연이은 원정들이 '적색 에릭의 사가'에서는 하나의 대항해로 통합되어 서술됩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원주민과의 대립

두 사가 모두 최초 항해 이후 가축을 동반한 본격적 정착 시도가 있었고, 이때 탐험가들은 카약을 타고 다니는 원주민 '스크렐링야르(Skraelingjar)'와 맞닥뜨립니다. '스크렐링야르'는 멸칭으로, '약한, 병든, 왜소한 존재'를 뜻합니다. 노르웨이어 '스크뢰라(skroela)'는 약하고 병든, '스크랄(skral)'은 약하고 왜소한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작고 검으며 추한 외모에 끔찍한 머리카락, 큰 눈과 큰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됩니다.

처음에는 평화로웠습니다. 원주민들은 모피를 주고 천과 젖을 받았는데, 토르핀 칼세브니가 무기 제공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원주민들이 놀라 도망쳤다가 다시 공격해오자, 격렬한 충돌 끝에 그린란드인들은 기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칼세브니가 데려온 수소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울부짖자, 그 소리에 놀란 원주민들이 카누를 타고 남쪽 해안을 따라 달아났습니다. 3주간 나타나지 않던 그들은 남쪽에서 수많은 배로, 켈트족의 급류처럼 빠르게 다가왔습니다. 해를 향해 창을 치켜들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습니다. 칼세브니 측이 붉은 방패를 보이자 그들은 상륙해 달려들었고, 화살비를 퍼부으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장대 끝에 거대한 공, 마치 양의 방광처럼 푸르스름한 것을 매달아 던졌는데, 그것이 떨어지며 내는 굉음에 칼세브니의 병사들은 사방이 포위된 듯 공포에 질려 강을 따라 달아났습니다. 바위 지대에서야 간신히 버텼습니다. (적색 에릭의 사가, 레마클 번역)

여전히 수수께끼인 빈란드

빈란드의 위치 비정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바핀 섬이 헬룰란드, 래브라도 반도가 마르클란드에 해당한다는 데는 이견이 적습니다. 그러나 빈란드의 위치는 더 논쟁적입니다. 세인트로렌스 강 우안에서 케이프 코드 사이 어디쯤으로 봅니다. 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합니다. 랑스 오 메도 유적지에서 개암나무(butternut) 흔적이 나왔는데, 이 나무는 그 위도에서 자랄 수 없습니다. 북방 한계선이 위도 47도, 캐나다 미라미치와 뉴브런즈윅 지역과 일치합니다. 야생 포도 역시 이 위도에서 자라며, 연어 또한 뉴욕 주 북쪽 강에서만 서식합니다.

따라서 북쪽 기지 스트라움피오르드는 랑스 오 메도, 남쪽 기지 홉은 캐나다 뉴브런즈윅 인근으로 봅니다. 다른 연구는 빈란드를 노바스코샤 주의 케이프브레턴 섬 북단 베이 세인트로렌스와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즉 빈란드는 세인트로렌스만 일대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홉과 스트라움피오르드 유적지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스크렐링야르'가 어떤 인디언이나 이누이트 집단에 해당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베오투크족(뉴펀들랜드 원주민), 도르셋 문화인(북극 이누이트), 믹맥족(북동부 해안 아메리카 원주민)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됩니다.

마지막으로 '빈란드'라는 용어의 의미로 돌아가 봅니다. 빈란드는 1075년경 연대기 작가이자 지리학자 아다모 브레멘시스(아담 오브 브레멘, 1050~1085)의 저서 '북방 제도기(Descriptio insularum Aquilonis)'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덴마크 왕 스벤 2세(1020~1076)의 궁정에 머무르며 북방 지리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또한 그는 이 바다에서 많은 선원들에 의해 발견된 한 섬을 지적했는데, 그곳은 포도가 저절로 자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기 때문에 빈란드라 불린다."

아담이 제시한 빈란드의 의미('포도의 땅')는 오역입니다. 그는 고대 게르만어에 가까운 고대 노르드어를 오해했습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vin'(와인/포도)+'land'은 '비옥한 땅', '초원의 땅'을 뜻하지만, 고대 게르만어에서 'vin'은 포도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포도의 땅'으로 잘못 옮겨진 것입니다.

빈란드 지도

빈란드 지도는 15세기 제작된 세계지도로, 예일 대학 베니키 도서관 소장입니다.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땅들, 즉 '비놀란다 인술라(Vinlanda Insula)'라는 섬이 그려져 있는데, 큰 하구(세인트로렌스 강 추정)와 수로로 접근 가능한 호수(허드슨만 추정)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이 지도의 진위 여부는 오늘날에도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1957년 기증되었으며 진품 '타타르사 편년사(Historia Tartorarum)' 코덱스와 함께 있었습니다. 내용물, 잉크, 종이에 대한 정밀 분석이 이어졌습니다. 양피지 탄소연대측정 결과 1423~1445년 사이로 나왔습니다. 1974년 잉크 분석에서 이산화티타늄이 검출되었는데, 이 물질은 1920년대 이후에야 화학적으로 제조 가능합니다. 다만 미량이라 외부 오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필적은 거의 지워진 검은 선 위에 황색 선이 겹쳐 있습니다. 중세 필사본에 쓰인 철분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 황변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된 검은 안료는 철이 아닌 탄소입니다. 즉 황색 선은 노화 현상이 아닌 위조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레이프 에릭손 항해 기념

2000년, 레이프 에릭손 항해 천 년을 기념해 건조된 복원선 '이스렌딩구르(Islendingur)'호가 출항했습니다. 군나르 마렐 에게르트손 조선소가 고크스타드선(Gokstad ship)을 본떠 만든 이 배는 아이슬란드 국경일인 6월 17일 레이캬비크를 떠나, 에릭 적색 축제가 열리는 부다르달루르에 기항한 뒤 케이프 페어웰을 돌아 7월 28일 랑스 오 메도스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렌딩구르호는 1882년 발견되어 870년대 것으로 판명된 고크스타드선의 복원품입니다. 건조에 목재 18톤, 못 5,000개가 소요되었으며, 길이 22.5m, 폭 5m, 흘수 1.7m입니다.

레이프 에릭손과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항해

또한 매년 10월 9일, 미국은 '레이프 에릭손의 날'을 기념합니다. '콜럼버스의 날'보다 사흘 앞선 날짜입니다. 이 날짜는 1825년 최초의 노르웨이 이민자들을 태운 '레스토레이션(Restauration)'호가 뉴욕 항에 입항한 날을 기리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 바이킹의 유럽, 공저. 다울라 수도원, 호에베케, 2004.
-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빈란드: 중세 스칸디나비아인의 서진 운동에 관한 시론, 레지스 부아예, 아르케 출판사, 2011.
- 바이킹, 레지스 부아예, 템푸스, 2015.

자료 출처

- '적색 에릭의 사가' 및 '그린란드인의 사가', 아이슬란드어 원전 번역 및 주해: 레지스 부아예, 폴리오 포켓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