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인들에게 노예 무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미지의 땅이었던 아프리카 대륙은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담대한 탐험가와 지도 제작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이자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역시 나일강의 수원지를 밝혀내기를 꿈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849년부터 중부 및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차례의 탐사를 진행하며 잠베지 강과 그 지류의 유로를 확인했고, 여러 호수를 발견했으며, 콩고 강 수원지라는 난제를 푸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아마도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횡단한 유럽인이 바로 그였습니다.
선교사이자 탐험가로 산 인생
1813년 3월 19일, 글래스고 근처 블란타이어의 가난한 스코틀랜드 가정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 중 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열 살 때부터 면방직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야학 수업에 다녔던 그는 총명하고 부지런한 성품 덕분에 수많은 여행기를 접하게 되었고, 이는 어린 그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독실한 신앙을 지닌 그는 19세 때 전도자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고, 장학금을 받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838년에는 런던선교협회에 가입했으며, 3년 뒤 아프리카로 파송되었습니다. 케이프타운에 잠시 머문 뒤 그는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오늘날의 보츠와나)으로 향했습니다.
리빙스턴은 베추아날란드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며 북진을 시도했습니다. 길목마다 네덜란드계 백인 식민주의자인 아프리카너들의 적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유럽인이 한 번도 탐사하지 않은 땅을 넘어섰습니다. 특히 1849년에는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여 응가미 호를 발견했고, 이어 1851년에는 잠베지 강에 도달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원정(1852~1856)에서 동해안이나 서해안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을 찾던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잠베지까지 북상한 뒤, 다시 서쪽으로 대서양 연안의 루안다까지 진출했습니다. 1854년에는 카사이 강을 발견했으며, 이어 잠베지를 따라 인도양 하구까지 내려가는 여정에서 1855년 11월 거대한 폭포를 목격합니다. 현지인들은 이 폭포를 "우레처럼 울리는 연기"라고 불렀고, 리빙스턴은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습니다.
동아프리카의 발견
1856년 영국으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위대한 탐험가로 추앙받았습니다. 그의 발견은 당시의 모든 지도를 수정하게 만들었고, 저서 『선교 여행과 남아프리카 탐사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1857)는 루안다에서 잠베지 하구까지 대륙을 가로지른 여정을 담아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선교 협회를 떠났고, 1858년 영국 정부로부터 동아프리카 해안의 영사로 임명되어 켈리마네(현 모잠비크)에 부임하며 동부·중부 아프리카 탐사라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1858년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리빙스턴은 잠베지의 지류인 시레 강 상류 탐사에 나섰고, 최초의 포르투갈 탐험가들로부터 약 두 세기 뒤에 말라위 호를 발견했으며, 1859년에는 로부마 강과 칠와 호도 확인했습니다. 한편 아랍인과 포르투갈인 노예 상인들이 아프리카인에게 저지르는 만행에 깊은 충격을 받은 그는, 1865년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노예 무역을 규탄하고 이 지역(오늘날 말라위와 모잠비크 대부분)의 경제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저작을 집필했습니다.
나일강 수원지를 향한 마지막 원정
1866년, 친구와 지지자들의 재정 지원 덕분에 리빙스턴은 다시 탐사길에 올랐습니다. 목표는 나일강의 수원지와 나일·콩고 유역을 가르는 중부 아프리카의 분수계를 밝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부마 강을 따라 이동하여 음베루 호와 방웨울루 호를 발견한 뒤, 1869년 탕가니카 호에 도달했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탕가니카 호변의 우지지를 거점으로 삼은 리빙스턴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온 세계가 그의 실종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던 1870년, 그는 호수 서쪽 지역을 향한 정찰에 나서 룰라바(현 콩고민주공화국)에 이르렀습니다.
극심한 고난의 시기를 겪은 뒤 우지지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1871년 11월, 앵글로아메리칸 출신 기자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가 이끄는 뉴욕 헤럴드지의 구조대와 합류합니다. 스탠리가 탐험가를 맞이하며 건넨 말, 즉 "리빙스턴 박사이십니까?"(Dr. Livingstone, I presume?)는 역사에 남는 명대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탕가니카 호 북부 지역을 탐사했습니다. 이후 스코틀랜드 출신 탐험가는 다시 나일강 수원지를 찾아 떠났고, 이 마지막 여정은 그가 사후에 출간된 일기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빙스턴은 1873년 4월 30일경, 치탐보(현 잠비아)에서 탈진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흑인 동료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자리 옆 나무 아래에 심장을 묻어 주고, 시신을 동해안의 잔지바르로 운구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1874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탐험가들의 아프리카: 나일 강의 수원지를 찾아서》, 앤 위용(Anne Hugon) 지음, 갈리마르, 1991.
- 《리빙스턴을 찾아서》, 헨리 모튼 스탠리 지음, 데쿠프만, 2015.
- 《잠베지와 중부 아프리카 탐사담》, 데이비드 리빙스턴 지음, 아셰트 BNF,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