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스캔들은 1972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선거본부에서 벌어진 미국의 정치 간첩 사건이다. 1972년 6월 17일, 공화당을 위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던 5명의 남성이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의 두 기자가 폭로한 이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최측근까지 기소하게 만든 의회 조사로 이어졌고, 결국 닉슨은 1974년 사임이라는 뜻백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례 없는 정치 스캔들은 국민이 선출직 공무원에게 갖던 신뢰를 흔들었으며, 미국 헌정 질서의 견고함을 시험한 첫 번째 시련이었다.
의심에 가득 찬 미국
리처드 닉슨(1913~1994)은 1960년대 격렬한 항의 시위가 이어지던 가운데, 1968년 11월 5일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낮은 과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매(Hawk)'와 '비둘기(Dove)' 사이에서 깊이 분열된 사회는 더 많은 병력의 베트남 파병과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승리의 미국은 의심의 미국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이후 수십 년간 더욱 강화될 새로운 보수주의가 이곳에 뿌리내렸다. 닉슨은 국가의 '질서 회복'을 약속하며 백악관에 입성했고,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의 민주당 과잉 정책 이후 연방 지출 삭감을 내걸었다. 중산층의 대변인을 자처한 그는 그동안 소수자의 목소리에 가려져 있던 '침묵하는 다수'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철수로 거센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미국 사회의 균열은 여전했다. 1973년 석유 위기, 두 차례에 걸친 달러 가치 평가절하 등 암울한 경제 상황이 이어졌다. 철수 과정은 닉슨이 암시했던 것보다 느리고 훨씬 즉흥적이었으며, 그가 이어받은 전쟁은 궁극적으로 존슨의 전쟁만큼이나 길게 이어졌다. 다만 1969년부터 시작된 철수는 1972년 강화 협상 타결 이후 속도를 더했다. 1973년 1월 발표된 휴전 협정은 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지만, 이것이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주요 실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의 굴욕은 1975년 4월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넘어가면서 확인되었다. 닉슨은 실용주의에 기반한 외교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특히 소련·중국과의 역설적인 화해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대통령 중 한 명의 업적은 안팎으로 호평과 비판이 뒤섞여 있다.
통제를 벗어난 대통령, 닉슨
캘리포니아의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던 닉슨은 언제나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결단력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초기 경력에서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아이젠하워 밑에서 8년간 부통령을 지냈고, 1960년 첫 대선 도전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했다. 신랄하고 공격적이며, 자신이 싫어하는 언론 앞에서 종종 어색한 모습을 보였지만, 유능한 정치인이자 강경한 연설가였다. 또한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 백악관 문을 활짝 여는 방법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보좌관과 직속 기구를 크게 확장했는데, 일부는 이를 두고 '행정부 인플레이션'이라 불렀다. 의회의 통제를 벗어난 대통령 보좌관과 기구가 늘어나며 '제왕적 대통령제'로 흐른다는 위험 인식이 점점 커져갔다.
닉슨의 업무 방식은 독특했다. 의심이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협력자들로부터 종종 고립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각종 감시를 장려했으며, 스스로 전화 도청을 활용하고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정보기관에 자주 의존했다. 바로 이 은밀한 활동들이 대통령의 몰락으로 이어질 스캔들을 낳았다.
1971년 6월 공개된 '펜타곤 문서'는 닉슨의 검열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방부가 여론과 의회를 의도적으로 기만해 왔음을 드러냈다. 국방부는 베트남 대규모 개입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이는 전쟁이 무의미하다는 인식에 혼란을 더했고, 미국인 대다수의 쓰라린 후회를 깊게 했다.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다. 이 첫 번째 스캔들은 언론의 힘과 역할을 조명했는데, 그 주역은 닉슨이 최우선 적으로 여겼던 언론, 그중에서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였다.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닉슨의 사임
워싱턴 중심부의 고급 건물 단지 워터게이트(Watergate)에서 벌어진 대형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였다. 워터게이트 빌딩은 당시 1972년 대선을 준비하던 민주당이 본부로 삼은 곳이었다. 개입을 부인하려던 닉슨 측근들의 어설픈 행동이 건물 도청 시도 이후 드러나면서, 대통령 캠프를 둘러싼 기이한 행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1973년 사건이 공개되자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대통령이 자신의 직위가 지닌 존엄을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그럼에도 닉슨은 오랫동안 결백을 주장하며 스스로 위증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의 지지율은 탄핵 소추 절차가 수개월째 진행되던 1974년 4월 최저점을 기록했다.
1974년 8월 8일, 닉슨은 완전한 굴욕 속에 사임하고 정계 은퇴를 결심했다. 이미 스스로를 의심하던 미국인들은 이제 지도자를,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 권위마저 깊이 의심하게 되었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신뢰 격차는 계속 벌어졌고, 후계자인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재임 1974~1977)와 민주당의 지미 카터(재임 1977~1981)조차 워싱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지 못했다.
더 읽어볼 만한 자료
- 《워터게이트 스캔들: 닉슨을 무너뜨린 사건》, 쿠엔틴 콘바드 지음. 50분, 2015.
- 《Deep Throat: 워터게이트 내부고발자의 실화》,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지음. 폴리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