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질 군사독재기 코스타 에 실바 정부: '경제 기적'과 AI-5, 억압의 심화

브라질 군사독재기 코스타 에 실바 정부:  경제 기적 과 AI-5, 억압의 심화

아르투르 다 코스타 에 실바(Artur da Costa e Silva)는 브라질 군사독재 시기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건강 문제로 직무에서 물러났으며, 재임 기간 동안 개발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독재 체제의 사회에 대한 억압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 정부의 출범

코스타 에 실바는 1967년 3월, 유일한 후보로 참여한 간접 선거에서 승리하며 브라질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의 집권은 군 내부의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권력 다툼에서 미국에 가까운 군 지식인 집단인 '카스텔리스타스(castelistas)'는 체제를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강경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세력, 즉 '강경파(hard-line)'에게 패배했습니다. 다만 군 내부에 이견이 있었음에도, 권력이 장교들의 손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가 카스텔루 브랑쿠(Castello Branco)의 후계자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그는 연설을 통해 브라질에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 때문에 많은 사회 집단은 그를 체제의 자유화·민주화에 대한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연설과는 달리, 코스타 에 실바 정부는 오히려 군사독재 역사상 가장 큰 억압의 시기로 이어지는 전환을 공고히 했습니다. 억압 장치는 확대되었고,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등은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위축되었습니다. 이러한 강경 노선은 1968년 제5차 제도법(AI-5)의 발효와 함께 본격화되었습니다.

경제 정책

코스타 에 실바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일정 부분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의 노선과 결별했습니다. 긴축은 새로운 이념적 방향과 맞물린 개발 프로젝트로 대체되었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의 개발주의 정책은 산업 성장의 장기적 안정화를 목표로 했으며, 소비 진작과 공공 투자 확대 계획도 함께 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제 정책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소위 '경제 기적'으로 알려진 현상을 낳았습니다. '경제 기적'은 빠른 경제 성장의 시기를 특징으로 하며, 이 시기 경제의 평균 성장률은 11%에 달했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 정부 시절 그 성과는 빠르게 나타나, 1968년 브라질 GDP는 11.2% 성장했고 1969년에는 10%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눈부신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경제 기적은 사회 불평등의 심화와 브라질 대외 부채의 급증이라는 그림자를 함께 안고 있었습니다.

야권의 성장과 체제의 강경화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코스타 에 실바 정부 시기에 더욱 커졌습니다. 사회 각계각층이 독재에 맞서면서 군부는 체제를 더욱 강경화하고 억압을 강화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이는 1964년부터 진행되어 온 과정의 구체화였습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반대 운동 중 하나는 1964년 쿠데타와 독재를 지지해 왔던 세력의 분열이었습니다. 이 흐름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브라질 보수파의 거물이자 쿠데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를루스 라세르다(Carlos Lacerda)입니다.

카를루스 라세르다는 1965년 대통령 선거 무산과 1966년 자신의 정치권리 박탈에 따라 독재 정권과 결별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가 경제 발전의 지속과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는 야권 연합 '광역전선(Frente Ampla)'을 결성했습니다. 광역전선은 주셀리누 쿠비쳉크(JK)와 주앙 고울라르트의 지지도 받았지만, 1968년 정부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학생 운동은 코스타 에 실바 정부 시기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운동이었고, 그만큼 억압도 가장 혹독하게 받았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에 맞선 학생들의 시위는 1968년 1월에 시작되어, 같은 해 3월 리우데자네이루의 시위에서 학생 에드송 루이스 데 리마 수투(Edson Luís de Lima Souto)가 경찰에 살해되면서 더욱 거세졌습니다.

에드송 루이스의 죽음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낳았고, 1968년 상반기 내내 전국의 학생들을 동원해 수십 차례의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는 6월에 열린 '십만인 행진(Passeata dos Cem Mil)'으로, 전국적으로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인들도 대거 참여했습니다.

정부의 대응은 학생 운동에 대한 가차 없는 탄압이었습니다. 7월에는 거리 시위가 금지되었고, 곧이어 대학들이 정부 경찰력에 의해 수색당했습니다. 이러한 탄압은 많은 학생들을 무장 투쟁이라는 저항 방식으로 내몰았습니다.

노동 운동 역시 박해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미나스제라이스와 상파울루에서 벌어진 파업은 진압되었고 수많은 시위 참가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정부의 탄압으로 노동 운동은 거의 10년간 잠복 상태에 빠졌다가, 1970년대 말에야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제5차 제도법(AI-5)

사회 운동과 정치권의 반발에 직면한 군부의 선택은 억압의 제도화였습니다. 이를 위해 1968년 12월 13일자 법령으로 제5차 제도법(Institucional nº 5, AI-5)이 제정되었습니다. AI-5가 발효된 직접적인 계기는 하원의원 마르시우 모레이라 아우베스(Márcio Moreira Alves)에 대한 징계를 의회가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원은 1968년 9월 본회의에서 육군을 "고문자들의 소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군부는 마르시우 모레이라 아우베스에 대한 소추를 요구했지만, 의원들이 이를 거부하자 군사정부는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는 정치적 불복종 정세에 대한 군부의 깊은 두려움이 표출된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대응으로 AI-5가 발효되면서 군사독재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AI-5는 군에 반대파를 감시하고 체포할 수 있는 새로운 권한과 언론 검열 권한을 부여했으며, 고문을 군 내에서 일상적인 관행으로 만들었습니다.

코스타 에 실바 정부의 종말

아르투르 다 코스타 에 실바는 1969년 3월까지 브라질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뇌졸중풍을 앓은 뒤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직무에서 물러났습니다. 대통령 직위는 일시적으로 군사준비회의(군정 위원회)가 수행한 뒤, 몇 달 후 에밀리우 가라스타주 메디시(Emílio Garrastazu Médici)에게 넘겨졌습니다.


출처: FAUST, Boris. 『History of Brazil』. 상파울루: Edusp, 2013, p. 411.
* 이미지 출처: FGV / CPD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