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마 제국과 로마 문명의 역사: 탄생부터 멸망까지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으며 시작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까지 이어진 고대 역사의 한 시기입니다. 전성기에는 브리타니아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며, 수많은 민족과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거대한 정치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로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불리는 오랜 평화와 안정, 번영을 국경 내에 가져왔으나, 변방 민족들의 압력이 커지면서 결국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전과 공화정의 종말

기원전 44년, 로마 공화정은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앞서 수십 년간 마리우스와 술라(기원전 88~87, 82~81년), 세르토리우스 전쟁(기원전 82~72년), 카틸리나 음모(기원전 63~62년) 등 잇따른 내전을 겪은 상태였습니다. 최후의 내전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서 벌어졌고,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의 패배로 막을 내렸습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10년 임기의 독재관, 기원전 44년 2월에는 종신 독재관에 올랐으며, 소아시아의 강적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월 15일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을 촉발해 공화정의 운명을 결정짓고 로마 제국의 등장을 예고했습니다.

카이사르 장례식에서 안토니우스는 유언을 낭독하고 칼에 찢긴 토가를 보이며 군중을 선동했습니다. 폭도들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고, 이들은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기원전 43년 10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볼로냐 회담에서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키케로를 포함한 300여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듬해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 삼두정치는 로마 세계를 나눠 가졌습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옥타비아누스는 서방,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았고 이탈리아는 공동 관할로 남겼습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나울로코스 해전에서 격파하고, 레피두스를 축출해 서방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33년 삼두정치 임기가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갱신을 거부하고 안토니우스를 공격했습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로마 영토를 상속시키고 알렉산드리아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이 공개되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권한을 박탈하고 이집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고,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직할 속주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창시자

카이사르가 시작한 공화정 개혁이 암살로 중단된 후, 그 과업은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갔습니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신성한 자)'라는 칭호와 '프린켑스(제일인자)'라는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호민관의 권한(입법 제안권, 거부권, 신체 불가침권)을 매년 갱신받으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고, 기원전 13년에는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올라 종교까지 장악했습니다.

기존 제도를 급격히 바꾸지 않으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공화정 기관들(민회, 원로원, 정무관)은 유지되었으나 실권은 점차 프린켑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칭호를 쓰지 않고 '제일인자'로 불렸으며, 장기간의 내전을 끝내고 속주 통치 체제를 정비해 향후 2세기 동안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

아들 없이 죽은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재정을 건전화하고 군기를 바로잡았으나, 말년에는 카프리 섬 별장에 은거하며 세야누스 등 근위대장의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근위대가 황제를 세우고 폐위시키는 관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광기로 악명을 떨치다 서기 41년 근위대에 암살당했고, 그의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유다, 트라키아, 브리타니아를 정복해 국경을 확장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자유민을 등용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원로원 문호를 넓히고 지방 유력자들에게 시민권을 폭넓게 부여한 점도 특징입니다. 그는 54년 독살당했고(아내 아그리피나 소행설), 그녀의 아들 네로가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네로는 스승 세네카의 보필 아래 초반 5년간 온건한 정치를 폈으나, 라이벌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샀습니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자(네로 방화설은 후대의 왜곡일 가능성이 큼), 기독교도를 탄압의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재민 구호와 방화 대책을 세운 도시 재건에 나섰으나, 막대한 비용을 이탈리아와 속주 수탈로 충당했습니다. 예술가와 신비주의자를 자처하며 공개 무대에 선 네로는 군부와 귀족의 반감을 샀습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

네로가 군부 반란으로 실각한 후, 군대는 황제 선출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로 이어진 플라비우스 왕가는 초기 제국의 검소한 원수정으로 회귀하며 원로원의 권위 회복과 민생 안정에 힘썼습니다. 이 시기에 콜로세움이 건립되어 검투사 경기 등 대중 오락의 장이 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 재위(69~79년) 중 유대인 봉기가 진압되고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제2차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일어났습니다. 티투스 때(79~81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헤르쿨라네움과 폼페이가 매몰되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81~96년) 치하에서 문학은 융성했으나, 그는 잔혹한 폭군으로 변해 공포 정치를 펼치다 암살당했습니다.

2세기는 '5현제(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로, 제국의 최대 번영기였습니다. 정치 권력은 황제에게 더욱 집중되었고 원로원은 쇠약해졌습니다. 트라야누스(98~117년)는 다키아,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를 정복해 제국 영토를 최대 확장했고, 탁월한 행정가로도 명성을 남겼습니다. 유베날리스, 소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같은 문인들이 그의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117~138년)는 동방 일부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국경을 공고히 하고 내치를 다져 21년간 태평성대를 이끌었습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도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는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통치하다 169년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게르만족 등 이민족의 대이동과 침입으로 고난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안토니누스 왕조 시기 기독교가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1세기 바울의 선교 여정 이후 아시아를 중심으로, 2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도로 개종했다는 추산도 나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는 체제 도전 세력으로 간주되어 조직적 박해를 받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180~192년)는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꼽히며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난정과 칼리굴라, 네로 때의 혼란은 로마 세계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제국의 팽창과 부는 주변 민족을 끌어당겼고, 국경(리메스)의 요새화와 용병 고용이 체계화되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 모델을 수용해온 로마 문명은 이제 새로운 적응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와 로마 문명의 확산

광대한 로마 세계는 속주로 나뉘어 각각 독자적 법과 행정으로 다스려졌습니다. 로마는 지방 유력자들을 통치에 참여시키고, 충성스러운 봉사에는 시민권으로 보답했습니다. 국교가 있었으나 수백 신이 공존했고, 인신 공양만 아니면 종교를 관용했습니다. 다만 황제 숭배와 로마 신 제사는 충성의 표지로 강요되었고, 이를 거부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박해받았습니다.

제국 전역에서 로마식 생활 양식이 장려되었습니다. 브리타니아, 다뉴브 강변,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어디서나 동일한 도시 계획(수로, 목욕탕, 극장 등)이 적용되었습니다. 군대도 로마화의 도구였습니다. 속주민이 보조병으로 입대하면 라틴어를 익히고 제대 시 시민권을 얻어, 정복민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으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습니다. 라틴어는 서방에서 켈트어(브리타니아), 바스크어(피레네) 등을 밀어내고 토착어가 되었고, 이탈리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카탈루냐어·포르투갈어·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군이 지방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동방에서는 그리스어가 오랫동안 공용어로 남았습니다.

경제와 국방

국경 내에서는 전쟁과 약탈의 위협 없이 교역이 번성했고, 로마 화폐가 거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제국은 기초 물자를 자급자족했으며, 급성장하는 도시(특히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집트, 아프리카, 시칠리아에서 대규모 곡물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포장도로망은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지중해는 로마의 내해처럼 통제되었습니다. 대다수 주민은 자급자족하는 농민이었고, 향신료·비단·향수·상아·보석 같은 사치품은 중국·인도·동아프리카에서 수입했습니다.

3세기에 접어들며 번영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민족 압력으로 국방비 지출이 늘자 은화 함량을 낮춰 재원을 마련했고,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황제는 군대에 의해 폐위되거나 처형당하기 일쑤였고, 내전이 빈발했습니다. 235~284년 사이 26명의 황제 중 1명(클라우디우스 2세)을 제외하고 모두 폭사했습니다. 게르만족과 페르시아 등은 이 틈을 타 제국 깊숙이 침입했습니다.

제국의 분열과 멸망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는 한 사람이 다스리기엔 제국이 너무 크다고 판단, 동서로 나누어 각각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를 두는 '테트라르키아(4두 정치)'를 도입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서로마의 수도는 로마,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군대를 배로 늘렸으나, 막대한 증세로 농민 생활이 파탄 나 인구 감소와 병력 충원난을 초래했고, 게르만족 용병 의존도가 높아졌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가 기독교 신의 도움 덕분이라 믿어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사후에 세례를 받았으나 재위 중 제국 전역에 교회 건립을 명령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결속력을 약화시키기도 했습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는 이교 의식을 금지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4세기 말, 중앙아시아에서 온 훈족이 동유럽으로 밀려오며 게르만족을 로마 국경으로 밀어냈습니다. 일부는 용병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믿음직한 동맹은 아니었습니다. 서로마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에서 계속된 이민족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아틸라(434~453년) 휘하 훈족이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제국을 유린했으나, 로마-게르만 연합군에 의해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에서 격퇴되었습니다.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을 구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476년 폐위될 때, 서로마는 이미 안팎으로 와해된 상태였습니다. 동로마 제국(훗날 비잔티움 제국)은 그 후 거의 천 년을 더 존속했습니다.

참고 문헌

  • 로마 제국사(전 3권), 폴 프티 저, 이기문 역, 책과함께
  • 로마 제국의 지정학, 얀 르 보에크 저, 이희일 역, 까치글방, 2014
  • 로마사, 마르셀 르 글레이·얀 르 보에크·장루이 부아쟁 공저, 민음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