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000년 초, 중앙아시아의 침입자들과 개척자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더스 계곡에 정착하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농업의 요람 가운데 하나로 빛나던 이 북인도 문명은 파라오 시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동시대를 이루었으며, 훗날 힌두교와 불교라는 두 위대한 종교를 탄생시키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 문명은 1920년 이후 진행된 고고학 발굴 덕분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더스 최초의 문명, 하라파 문명
남아시아 최초의 문명은 현재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 범람원에서 번성했습니다. 이 지역은 덥고 건조한 기후였지만,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자원을 지닌 점에서 메소포타미아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농업은 기원전 2600년경부터 이 일대로 확산되었고, 그리 오래지 않아 평야 곳곳에 수많은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그중 일부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인더스 계곡에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20년대였습니다. 특히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 이 두 유적은 고도로 도시화된 문명의 존재를 보여주는 첫 단서였으며, 그 역사는 4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계곡의 동시대 문명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도시를 비롯해 지역 내 다른 인구 밀집 거점들은 왕조의 수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굴된 유적은 극도로 잘 조직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마을은 체커보드식 격자 계획에 따라 설계되었고, 주민들은 신분과 직업에 따라 구역별로 나뉘어 거주했습니다.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진흙 벽돌로 쌓은 단 위에 세운 도심에는 정교한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림문자가 새겨진 인장들이 발견되었지만, 문자는 여전히 해독되지 않은 채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더스 주민들이 인도 아대륙 내륙은 물론 페르시아만 연안, 심지어 메소포타미아까지 광범위한 교역망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80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약 100년 뒤 도시들은 모두 버려졌습니다. 그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외세의 침입 가설은 배제되었으며, 농촌 지역의 생활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 그 근거입니다. 반면 기후 변화 등 자연재해가 문명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 인도와 새로운 신앙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의 아리아인들이 인도 북부로 이주해 왔습니다. 원래 반유목 생활을 하며 가축을 치르던 이들은 기원전 1000년경 무렵, 서쪽에서 동쪽으로 3,000km 이상 뻗어 있는 광활하고 비옥한 갠지스강 평야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즈음 아리아인들은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독자적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아인은 인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인도에서 쓰이는 수많은 언어가 그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에서 파생되었고, 현재 아대륙에서 가장 널리 믿어지는 종교인 힌두교 역시 그들의 신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최초의 힌두교 경전인 베다(Vedas)는 인드라(Indra) 신의 가호 아래 아리아인들이 겪은 이주와 전쟁을 노래한 신화적 서사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힌두교는 혈통에 따른 신분 분류, 즉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는 한때 아리아 사회를 지배했던 네 개의 바르나(varna), 즉 신분 계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열의 정점에는 브라만(사제)과 크샤트리아(전사)가 있었고, 그 아래 바이샤(농민·상인)가, 최하위에는 장인·노동자·노예를 포괄하는 수드라가 자리했습니다. 왕은 전통적으로 전사 계급 출신이었으며, 대지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 집행 같은 중요한 종교적 기능도 수행했습니다.
기원전 500년경, 힌두교는 인도 아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브라만이 권력 계층으로 군림하면서 그 역할에 대한 의문이 커졌고, 이는 자이나교(오늘날에도 인도에서 널리 행해짐)와 불교 같은 새로운 종교의 등장을 촉진했습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기원전 563~483년)가 창시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갠지스강 평야와 그 주변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다만 불교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은 기원전 268~233년 아쇼카 대제 통치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아쇼카 대제의 통치
아쇼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군주로, 기원전 321~293년에 통치한 할아버지 찬드라굽타가 개국한 왕조를 이었습니다. 유능한 행정가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던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 강 유역을 침공했을 당시 인도 북서부 군대를 지휘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갠지스 평야 최강국인 마가다(Magadha)를 손에 넣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의 수장으로서 그는 도로, 관개 시설 등 공공 인프라를 대거 건설했으며, 마침내 인도 북부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 재위 기원전 293~268년)는 마우리아의 세력을 국토 중앙의 데칸 고원까지 확장했습니다.
아쇼카는 인도 동부의 칼링가 정복으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참화에 깊은 충격을 받은 그는 불교로 귀의하여 삶을 비폭력의 길에 바쳤습니다. 그는 주변 열강의 군주들에게 더 이상 그들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스스로 사냥을 끊고 채식주의를 실천했습니다.
아쇼카의 명에 따라 부처의 가르침은 인도 전역의 바위와 석비에 새겨졌습니다. 그는 불교가 크게 번성한 스리랑카(실론),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는 물론, 멀리 시리아·이집트·아나톨리아까지 선교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종교적 관용 역시 아쇼카가 내세운 통치 원칙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도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불교로 귀의했지만, 대다수 백성은 평화롭게 전통 힌두교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마우리아 제국은 아쇼카 사후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기원전 185년, 제국은 여러 독립 국가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몰려온 새로운 침입자 사카족(스키타이와 동계)에게 거의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북방 일대의 영토를 장악한 것은 쿠샨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중국·페르시아·로마와의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새로 들어온 지배층은 피지배 민족의 언어와 종교를 수용하며 인도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인도 남부에서는 해상 무역로의 발달과 함께 번영하는 항구 도시와 독립 왕국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인더스의 잊혀진 도시: 파키스탄의 고고학』, 기메 박물관, 2008.
- 미셸 다니노(Michel Danino), 『인도와 어디에서도 찾아오지 않은 침략: 아리안 신화의 마지막 은신처』, Les Belles Lettres, 200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