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스페인 내전: 군주제에서 프랑코 독재까지

스페인 내전: 군주제에서 프랑코 독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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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에서 독재로

1814년,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에 절대왕정을 수립했습니다. 이 체제는 1873년 2월 11일, 아마데오 1세의 퇴위 이후 제1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1923년부터 1930년까지 스페인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 장군의 독재 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1931년 4월 14일,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공화파의 승리로 알폰소 13세의 통치는 종식되었고, 스페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36년 2월 16일, 총선에서 국민전선이 인민전선에게 패배하면서 정국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새 정부에 참여했지만, 위기감을 느낀 우파는 극우 세력과 손잡고 "좌파의 개혁에 맞서기" 위해 결집했습니다. 좌파는 파업으로 대응했고, 7월 13일 우파 정치인 호세 칼보 소텔로(José Calvo Sotelo)가 암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프랑코(Franco) 장군은 새 공화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 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합니다. 봉기는 7월 17일로 예정되었습니다.

1936년 7월 17일, 봉기의 시작

프랑코는 모로코 주둔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스페인 남부에 상륙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 명료했습니다. 바로 집권 정부를 즉각 전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군의 상당수는 정부에 충성을 유지했고, 반란에 가담한 세력은 프랑코를 따르는 국민파(Nationalists)였습니다.

반군은 사흘 동안 가능한 한 넓은 영토를 장악하려 했지만, 격렬한 민중 저항에 부딪혀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대도시들은 공화파 편에 남았고, 스페인은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코파 대 공화파

스페인은 두 지역으로 분단되었습니다. 한쪽에는 대도시와 가장 부유한 지역을 장악한 공화파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병력과 무기를 보충한 프랑코파가 있었습니다. 프랑코파는 '다른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의미에서 국민파라고 불렸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 양 진영은 피할 수 없는 충돌을 겪었습니다. 민간인들이 직접 전쟁에 뛰어들었고, 여성들도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Francisco Largo Caballero)는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승리를 본받아 자신의 당을 혁명 노선으로 이끌었습니다.

좌파 진영에서 공산당원들은 끊임없이 경쟁하던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을 하나로 묶으려 애썼습니다. 한편 시민 좌파는 아사냐(Azaña) 대통령을 따랐고, 인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는 독립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POUM(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에 합류했습니다.

1937년 5월, 공화파는 무력으로 국민파를 분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모델을 본떠 도시 곳곳에 체카(비밀경찰)가 설치되고 고문이 러시아에서처럼 자행되면서, 공산당원들은 오히려 공화파에게 적대적인 세력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좌파 광부들은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부대가 개입할 때까지 군의 공세에 맞서 버텼지만, 2주간의 전투 끝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바라본 유럽 열강

1936년 프랑스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 있었지만 인민전선은 이미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영국은 불개입을 주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소련, 히틀러, 무솔리니의 개입 확대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강대국이야말로 내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각국의 좌파 활동가들은 자발적으로 공화파 편에 서서 싸우러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또 다른 전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화파가 국제적 지원을 받는 동안, 파시스트 이탈리아 역시 국민파에 막강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점차 스페인 전역에 개입을 확대해 갔습니다.

특히 스위스에서는 공화파 편에 서서 싸우러 떠나려는 움직임이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기운이 공산주의와의 친연성으로 해석되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겨눈에 서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전쟁 발발 초기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파에 가담했습니다. 양국 모두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품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은 매우 후하게 지원하여 스페인에 전투기를 제공했습니다.

히틀러의 목표는 이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실전 훈련장으로 삼아 독일 장교단을 단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공화파의 마을들을 대상으로 신형 전술을 실험하며 기습전(블리츠크리크)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이 전술은 훗날 1939년 폴란드 침공과 1940년 프랑스 점령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소련과 공산주의자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스페인은 볼셰비키 사상을 받아들인 유일한 유럽 국가였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해방의 길로 여겼고, 그래서 많은 스페인인들이 잇달아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든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내전 기간 소련은 공화파 편에 섰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무기, 전차, 비행기, 심지어 병력까지 지원했습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위협으로 느끼던 스페인 공화파에게 소련은 없어서는 안 될 동맹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프랑코파만큼이나 아나키스트와 트로츠키주의자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지원은 결코 이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승리한 프랑코파

국민파의 승리는 1939년 3월 28일에 확정되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미래의 독재자 프랑코 장군 앞에서 프랑코파 부대의 퍼레이드가 열렸습니다. 1931년 수립된 민주 공화국은 막을 내렸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모델로 구축된 권위주의 체제 아래 처형이 곳곳에서 자행되었습니다. 반군의 승리 사흘 후, 스페인 전역은 프랑코의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코의 독재는 30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1936년 10월 1일 그는 스페인 국가의 정부수반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에는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수감된 공화파의 자녀들이 국민파 가정에 강제로 보내지는 등 아이들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외면되었고, 관련된 모든 흔적은 치밀하게 지워졌습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가 세상을 떠나고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제야 피카소(Picasso)는 마침내 <게르니카>(Guernica)를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남긴 깊은 상흔이자 프랑코 독재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었던 이 작품을, 화가는 프랑코의 권력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보관해 왔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