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의 아버지로 불릴 인물은 '영국적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서기 1934년부터 1947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무함마드 알리 지나와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정치 무대에서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라이벌이었다. 간디는 온전히 인도의 색으로 물든 정치의 혜성이었고, 세계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였다. 반면 지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국주의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간디는 지나보다 꾸란 구절을 더 많이 외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지나의 성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마음을 얻은 무슬림들 앞에서 정작 지나 자신은 전통 모국어인 우르두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음이 워낙 나빴던 나머지 어느 연설의 맺음말에서 그는 '파키스탄 진다바드(Pakistan Zindabad)'라고 외쳐야 할 말을 엉터리로 발음하고 말았다. 일부 기자들은 이를 농담 삼아 '파키스탄은 가방 속에 들어왔다(in the bag)'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간디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 지나
래리 콜린스와 도미니크 라피에르는 저서 『자정의 자유(Freedom at Midnight)』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나는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를 교활한 여우, 뱀, 그리고 누구와도 경쟁하려 드는 힌두교도라고 불렀다. 레너드 모즐리는 지나가 간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저 사람을 한 가지 입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뱀처럼 교활하다."
지나는 간디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콜린스와 라피에르는 『자정의 자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날 간디는 회담을 위해 지나의 관저를 찾았다. 휴식 시간 동안 간디는 지나의 값비싼 페르시아 융단 위에 몸을 눕히고 배 위에 흙을 올렸다. 지나는 이 장면을 결코 잊지 못했고,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나는 최소 두 차례에 걸쳐 국민회의당의 공개 포럼에서 퇴장당했다. 당원들이 지나에게 간디를 '마하트마'라 부를 것을 요구했지만, 지나는 끝내 'Mr. 간디'라고만 부르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네루의 정치 입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지나
콜린스와 라피에르는 『자정의 자유』에서 자와할랄 네루에 대한 지나의 분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나는 네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루가 여기 정치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가서 영어 교수나 되지. 겉만 번지르르한 작가 주제에 정치에 뛰어들다니. 오만한 브라만이다. 서구 교육이라는 베일을 두르긴 했지만, 속은 우직한 힌두교도일 뿐이다."
레너드 모즐리는 네루에 대해 지나가 이렇게 평했다고 기록했다. "서구 교육이라는 베일로 자신의 술수를 감추는 반항적인 브라만. 그는 약속할 때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나를 내려놓고, 길을 찾지 못하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정치판의 마키아벨리
지나는 정치에서 마키아벨리의 제자였다. 정치에는 고정된 원칙이란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원칙과 요구를 수시로 바꿔왔다. 처음에는 입법 의회에서 무슬림에 대한 별도 대표권을 요구했고, 이후에는 신드주와 프론티어주(북서변경주)의 분리를 주장하며 중앙 정부에서 세 번째 의석까지 요구했다. 마침내 그는 인도 분할의 지지자로 변신했는데, 그 분할 청구권에는 신드와 프론티어주는 물론 펀자브, 벵골, 아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파키스탄을 얻기 위해 그는 두 국가론(two-nation theory)을 받아들였지만, 파키스탄 건국 직후에는 세속 국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파키스탄을 광신적인 무슬림 국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내각 사절단(Cabinet Mission) 계획에 따른 인도 연합 내 주들의 그룹화에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정작 파키스탄 총독이 된 후에는 미국 대사에게 인도와의 공동군 운영, 자유 무역, 개방적인 통상 관계를 원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