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대한 집착은 과학의 탄생과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의 지식을 계승했다. 그 이후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모든 시대를 관통해 왔다. 그러나 우주가 정복된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의 일이며, 그 주인공은 미국인들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충격과 우주 경쟁의 서막
우주 경쟁의 막이 오른 것은 1957년 10월 4일,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였다. 국제지구관측년(IGY) 미국 프로그램 책임자 로이드 버크너가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고도 900km에서 지구를 돌고 있다고 발표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1890~1969)은 이를 "하늘의 작은 공"이라 폄하했지만, 냉전 한복판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적 승리를 넘어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입증하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3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하며 세계를 다시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라이카라는 개가 탑승해 있었고, 이는 소련이 유인 달 탐사를 계획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라이카는 귀환 수단이 없었기에 10일째 되는 날 독약이 든 먹이로 고통을 덜어줄 예정이었으나, 캡슐 온도가 40℃까지 치솟으며 발사 6시간 만에 생을 마감했다.
미국의 추격: NASA 창설과 머큐리 계획
이 연이은 충격에 미국은 국립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하며 기술적 열세가 아님을 입증하려 했다. 네이비의 뱅가드 발사를 앞당겼으나 실패했고,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가 궤도에 진입하며 첫 성공을 거뒀다. 3월 17일 뱅가드 1호도 임무를 완수해 현재 지구 궤도에 남은 가장 오래된 위성이 되었다. 하지만 3개월도 안 돼 소련이 길이 3.5m, 무게 1톤이 넘는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 올리며 다시 앞서 나갔다.
인류, 우주에 첫발을 내딛다
1961년 4월 12일, 소련 공군 조종사 유리 가가린(1934~1968)이 라스토치카호를 타고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그는 중력가속도로 시트에 눌리고, 음속 돌파와 함께 엔진음이 잦아들며, 초중력으로 언어 장애와 시야 협착을 겪었다. 비행은 순조로웠으나 전기 고장으로 낙하산 강하를 해야 했고, 2시간도 안 돼 33개국 상공을 지나 한 마을에 착륙했다. 놀란 마을 주민이 근처 개울을 가리키며 "오래 안 있어 익사하겠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소련의 연이은 승리에 미국은 5월 5일 앨런 셰퍼드의 머큐리 레드스톤 3호 아궤도 비행으로 맞섰다. 같은 해 여름 아폴로 계획이 머큐리 계획의 후속으로 출범했고, 이듬해 2월 20일 존 글렌이 프렌드십 7호로 지구 궤도 3바퀴를 돌며 미국인 최초 궤도 비행을 달성했다. 그러나 최초 2인승 비행도 소련 차지였다. 1962년 8월 11~15일 보스토크 5호(발레리 비콥스키)와 보스토크 6호(최초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연이어 발사됐다.
달 정복을 향한 질주
1960년대 초 이러한 경쟁 속에 존 F. 케네디(1917~1963)는 "10년이 가기 전 인간을 달에 보내고 무사히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NASA 국장과의 대화에서 그는 이 목표가 단순한 과학이 아닌 국가적 자존심과 안보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반면 니키타 흐루쇼초프(1894~1971)는 타국에 "패배"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비용을 우려해 1963년 10월 "우주비행사의 달 비행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가, 1년 뒤 달 착륙 도전을 약속하며 입장을 선회했다.
미국의 레인저 탐사선과 소련의 루나 탐사선이 달에 도달하는 가운데, 최초 유인 달 비행은 1967년 2월 21일 아폴로 1호로 예정돼 있었다. 버질 그리섬,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 세 우주비행사가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3주 전 지상 테스트 중 전기 스파크로 순수 산소 분위기에서 화재가 발생해 세 명 모두 질식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아폴로 1호 참사 후 NASA는 깊은 위기에 빠졌고, 아폴로 4~6호는 무인 비행으로 진행됐다. 이후 임무들은 우주복 테스트, 도킹, 달 착륙선 점검 등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폴로 10호는 달 표면 15km 고도까지 내려가 착륙 후보지를 촬영했다.
아폴로 11호, 인류의 달 착륙
1969년 7월 16일 오후 1시 32분, 케네디 우주센터 39번 발사대에서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다. 나흘 뒤 닐 암스트롱(1930~2012)과 에드윈 "버즈" 올드린(1930~)이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고, 마이클 콜린스(1930~)는 사령선에 남았다. 착륙 직전 거대한 분화구 경사와 자동차만 한 바위들이 발견돼 암스트롱이 수동 조종으로 안전한 지점을 찾아야 했다. 착륙 6시간 반 뒤인 7월 21일 오전 2시 56분, 암스트롱은 TV 카메라를 작동하며 인류 최초 달 표면 보행을 생중계했다. 그의 유명한 첫 마디와 함께, 올드린의 묘사도 문학적으로 빛난다: "아름다운 광경이야. 웅장한 황무지다."
우주 경쟁의 군사적 함의
인간의 달 착륙 이전부터 인공위성의 정치·군사적 가치는 입증됐다. 1961년 미국 세이모스 2호 위성 사진으로 소련이 주장보다 적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했음이 드러났다. 1963년 소련도 열세를 인식하고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했다.
레이건 대통령(1911~2004)은 1983년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스타워즈"라 불렀다. 1조 5천억 달러가 소요될 이 계획은 발사 후 20분 내 ICBM 핵탄두를 요격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1989~1991년 소련 해체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며 실행되지 못했다.
이처럼 미·소 양국의 팽팽한 라이벌 관계는 정치·군사·기술 전 분야, 특히 달과 인터넷이라는 기술 경쟁의 양대 목표와 핵무기를 축으로 한 군비 경쟁으로 냉전 시대를 규정지었다.
참고 문헌
- ES (2006):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며 한 말은? 마드리드: 20분.
- Duran, X. (2007): "스푸트니크: 궤도 위의 냉전" in Quark 39호 (45-49쪽).
- León Millán, J.M. (2013): "냉전과 우주 경쟁. 간략한 역사적 분석" in Pasaje a la Ciencia. ISSN:1699-6305, 15호 (13-21쪽).
- Martos, A. (2009): 우주 경쟁 간사. Ed: Nowtilus.
- Millán Barbany, G. (2000): "우주 정복" in 문화적 지평: 과학의 국경: 1998. ISBN:84-239-1776-2 (207-220쪽). 스페인: Espasa Calpe.
- Montes Moya, F. (2013): "달 경쟁" in Pasaje a la Ciencia. ISSN:1699-6305, 15호 (21-37쪽).
- Reuters (2013):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멘트는 즉흥이 아니었다. 마드리드: Europa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