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바누 카시(Banu Qasi), 중부 에브로 강 유역의 영주들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 당시, 일부 지방 영주들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항복, 협상, 투항, 이슬람 개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중 유명한 인물이 투드미르(테오도미로)인데, 무슬림 정복자들에게 항복하여 무르시아와 오리우엘라 지역 영주권을 유지한 조약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또 다른 비시고트 유력자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카시오 백작(Count Casio)이 있었는데, 후대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서 칼리프 알왈리드에게 경의를 표하고 신하가 되었으며, 그 대가로 훗날 '마르카 수페리오르 데 알안달루스(상부 변경구)'라 불리게 될 영토, 즉 에브로 강을 국경으로 하고 사라고사를 중심 도시로 하는 지역에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카시오 백작과 그 후손들은 나바라, 아라곤, 라리오하 현재의 지역에 해당하는 에브로 중류 계곡 일대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카시오 백작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부 후대 기독교 연대기는 그가 '고트족' 출신이었으나 무함마드의 종교(이슬람)를 받아들였다고 전합니다.

바누 카시 가문의 기원과 초기 역사

바누 카시 가문의 초기 수십 년은 사료가 부족해 불분명합니다. 카시오의 후손 몇 명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이들은 에미르 권력이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물라디(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베리아 원주민) 봉기들을 진압해야 했던 시기에 여러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이 시기는 샤를마뉴 대제가 이끄는 카롤링거 제국이 피레네 산맥과 에브로 강 사이의 지역, 즉 훗날 '스페인 변경구(Hispanic Brand)'가 될 지역에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하던 때와 겹칩니다.

무사 이븐 무사 이븐 카시, "스페인의 세 번째 왕" (816-872)

바누 카시 가문의 공고화와 전성기는 9세기 초, 카시오 백작의 손자 무사 이븐 무사의 시대에 시작됩니다. 무사라는 이름은 카시오 백작의 직계 후손 시절부터 가문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베리아 반도에 초기 무슬림 세력을 정착시킨 정복자 무사 이븐 누사이르(640년경~716년경)에 대한 경의나 숭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시고트 백작 자신도 그와 항복 및 복종 조건을 협상했었습니다.

842년경 무사 이븐 무사의 권력 거점은 라리오하의 아르네도 성에 있었습니다. 그해 무사는 압데라만 2세에게 반란을 선언하고, 이슬람 사료에서 '가르시야 이븐 완나코'로 불리는 친척 가르시아 이니게스와 군사 동맹을 맺었습니다. 둘은 코르도바에서 파견된 징벌 원정군을 격파하고 에미르 군의 지휘관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 소식에 격분한 압데라만 2세는 두 아들을 대동하고 직접 원정을 나서 843년 봄, 반란을 일으킨 바누 카시와 바누 완나코를 징벌하고 복속시켰습니다. 참혹한 공략 끝에 압데라만 2세는 무사 이븐 무사를 복속시키고, 충성과 이전 전투에서 포로로 잡았던 병사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그를 아르네도 총독(walí)에 임명했습니다.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무사와 바스크 친척들은 팜플로나 인근에서 다시 에미르에 맞서 봉기했고, 또다시 에미르의 원정으로 진압당했습니다. 한편, 노르만(바이킹) 선단이 리스본, 카디스, 세비야를 공격해 오자 압데라만은 병력을 나눠 격렬한 바이킹 약탈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바이킹의 이베리아 연안 원정이 활발하던 844년 여름에 벌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무사 이븐 카시는 압데라만으로부터 에미르 군에 합류해 바이킹과 싸울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무사는 다시 한번 독립적인 성향과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에미르의 본대에서 이탈해 모론 데 라 프론테라 인근에서 바이킹을 상대로 성공적인 매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무사는 그 후에도 압데라만 2세에 거듭 반란을 일으켰고, 에미르는 최소 두 차례(847년, 850년) 무력 진압에 나섰습니다. 무사의 반란 목표는 전략적 요충지 투델라의 장악이었는데, 결국 이를 달성하며 에브로 중류 지역에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851~852년은 결정적인 해였습니다. 압데라만 2세와 이니고 아리스타(무사의 이복형제로, 이슬람 사료에서는 '완나코 이븐 완나코'라 불림)가 차례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852년부터 859년까지 무사는 권력의 절정에 달했습니다. 새 에미르 무하마드 1세로부터 사라고사 총독으로 임명받아 에브로 중류 분지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행세하며, 스스로를 에미르 무하마드와 아스투리아스 국왕 오르도뇨 1세에 이은 "스페인의 세 번째 왕"이라 칭했습니다. 이 시기는 '알벨다 전투'로 알려진 두 차례 전투와 맞물리는데, 첫 전투는 물라디 세력을 고양시켰고 두 번째 전투는 그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시기에 무사는 알벨다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사라고사와 우에스카를 장악하고, 에브로 계곡에 일종의 독립 타이파 국가를 건설했으며, 아들 로페를 톨레도 총독으로 앉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카롤링거 군주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선물과 축하를 주고받으며 실질적으로 '스페인의 세 번째 왕'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바누 카시(Banu Qasi), 중부 에브로 강 유역의 영주들

이러한 성공이 오만함을 불렀는지, 전통적 동맹이던 팜플로나 세력이 그를 버리고 오르도뇨 1세에게 접근했습니다. 859년, 1차 알벨다 전투에서 무사에게 패배해 굴욕을 당한 오르도뇨 1세와 팜플로나 국왕 가르시아 이니게스가 연합해 무사를 공격했습니다.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알벨다를 포위하고 다른 쪽은 무사의 반격을 대비했습니다. 기독교 연합군이 무사 군을 격파했고, 무사는 중상을 입고 도주했습니다. 연합군은 알벨다에 입성해 무사가 위세를 과시하며 건설한 자랑스러운 도시를 약탈하고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이후 무사 이븐 무사는 더 이상 자존심 강한 독립 군주로 행세할 수 없었고, 아버지 덕분에 톨레도 총독이 된 아들 로페마저 버림받았습니다. 로페는 시대가 변했음을 깨닫고 승승장구하는 오르도뇨 1세에게 붙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알벨다 패배로 아스투리아스와 팜플로나 세력이 기세를 올리자, 무사는 에미르 무하마드 1세에게 복종하고 에브로 계곡의 영토를 점점 압박해 오는 기독교 세력에 맞설 도움을 청했습니다. 860년 무사는 상부 변경구 총독직에서 해임되었고, 2년 뒤인 862년 9월, 과달라하라에서 사위와 대치 중 창에 맞아 투델라에서 사망했습니다. 무사 이븐 무사와 바누 카시 가문을 가장 깊이 연구한 알베르토 카냐다 후스테는 그를 "반복되는 반역, 때로는 충성, 이익이 되면 배신, 야망, 오만,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시험을 견뎌낸 용기"가 혼재된 인물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자질과 독특한 생애 덕분에 무사는 매력적인 역사적 인물이 되었고, 투델라 출신 작가 카를로스 아우렌산스가 2009년부터 그의 삶과 가문을 다룬 역사 소설 3부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사자 새끼들: 무사 이븐 무사의 아들들 (바누 무사)

말년의 좌절로 무사의 아들들은 코르도바 에미르국의 권세 아래 복속되었습니다. 그중 두 명은 무하마드 1세의 인질이 되었습니다. 862년부터 872년까지 10년간 바누 무사는 에미르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그가 이룬 업적을 잊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기독교 왕 알폰소 3세에게 접근해 에미르 무하마드에 맞설 재봉기 가능성을 타진했습니다. 871년 말에서 872년 초, 바누 무사(로페, 포르툰, 무타리프, 이스마일)는 형제 중 맏이이자 생전 아버지의 후원으로 톨레도 총독을 지낸 로페의 주도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상징적 거점인 아르네도 성에서 출발해 로페와 형제들은 병력을 분산해 사라고사, 우에스카, 투델라 등 상부 변경구의 주요 거점들을 며칠 만에 동시다발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이 속도는 형제들이 병력을 나누어 여러 거점을 병렬적으로 공격한 것, 그리고 누이 오리아가 팜플로나 왕 가르시아 이니게스와 결혼해 매부지간이 된 그의 지원을 얻은 것, 속도와 기만 전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바누 무사는 사라고사, 우에스카, 투델라, 몬손, 아르네도, 비게라 등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하며 상부 변경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에미르 무하마드 1세의 반격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반란과 통제권 상실에 격분한 그는 신뢰하는 아랍계 투추비(Tuchubí) 가문을 칼라타유드와 다로카 등 반란군의 남쪽 국경 거점에 배치해 바누 무사의 남하를 차단하는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다로카와 칼라타유드는 무하마드 1세에게 충성하는 투추비 세력이 반란군과 싸우는 필수적인 작전 기지가 되었습니다. 에미르는 통상 아들을 원정에 보내던 관례를 깨고,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직접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듬해 봄 징벌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 원정으로 에미르는 무타리프를 포로로 잡고 우에스카를 수복하며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웠지만, 세월이 흐르며 바누 무사 대부분이 몰락했습니다. 무타리프와 그 아들들은 873년 9월 무하마드 1세 명령으로 처형되었고, 875년 봄에는 맏형 로페가 사슴 사냥 중 팔을 다쳐 그 상처로 사망했습니다. 포르툰(투델라 통치)과 이스마일만 무사 이븐 무사 가문의 생존자로 남았습니다. 다만 모든 학자가 포르툰이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스마일이 가문의 수장이 되어 사라고사에서 세력을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무하마드 1세 군대의 공격을 견뎌내며 버텼으나, 결국 875년 사라고사를 코르도바 에미르에게 매각했습니다. 이후 이스마일은 레리다와 몬손을 거점으로 삼았고, 이베리아 남부에서 물라디 봉기가 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려 일정 기간 평온이 이어졌습니다.

바누 카시(Banu Qasi), 중부 에브로 강 유역의 영주들

886년 여름 에미르 무하마드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알문디르가 즉위했습니다. 짧은 2년 재위 기간 동안 알문디르는 말라가 산중의 난공불락 요새 보바스트로에서 우마르 이븐 하프순이 이끈 격렬한 물라디 반란에 직면했고, 그 성벽 앞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888년 동생 압둘라가 에미르가 되어 이븐 하프순이 이끈 봉기의 가장 힘든 시기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남부의 물라디 반란 진압에 역량을 집중해야 했던 덕분에 상부 변경구에는 평온과 자치의 시기가 찾아왔고, 이를 틈타 무사의 손자 무하마드 이븐 로페와 무사 대제의 유일한 생존 아들 이스마일 이븐 무사, 두 바누 카시 일원이 가문의 전통 영지 서부와 동부를 각각 장악했습니다. 이 상황이 팜플로나를 위시한 기독교 세력의 남하를 막았는데, 바누 카시가 에미르 압둘라를 위해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저항이 자신의 영지와 독립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889년, 무사 대제의 마지막 아들 이스마일 이븐 무사가 몬손에서 노환과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우에스카와 레리다 사이에 위치한 바르비타니아 지역의 영지는 말년에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이로써 거의 2세기 동안 에브로 중류 계곡에서 뚜렷한 역할을 했던 가문의 쇠퇴가 시작되었습니다. 무하마드 이븐 로페만 바누 카시의 유일한 일원으로 남아 8년간 여러 차례 사라고사 탈환을 시도했습니다. 무하마드 1세 때 바누 카시를 견제하려고 다로카와 칼라타유드에 배치해 키웠던 투추비 가문이 이제는 바누 카시가 그토록 원하는 사라고사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투추비 가문(아랍계)과 바누 카시(물라디계)는 에미르국 시대 이슬람 세계에서 영토에 뿌리내린 가문들이 어떻게 다양한 역학 관계 속에서 지역 권력을 재편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하마드 이븐 로페는 사라고사 탈환 시도 중 898년 사망했고, 아들 로페 이븐 무하마드를 톨레도 영주로 남겼습니다. 로페는 바르셀로나 원정 중 897년 바르셀로나와 헤로나 백작 위프레도 엘 벨로소를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898년 로페는 하엔 지역으로 가서 물라디 반란 지도자 우마르 이븐 하프손과 만나 우마야 에미르 압둘라에 맞설 연합을 논의했습니다. 이 물라디 연합은 우마야파 연대기 작가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데, 이들은 이븐 하프순을 "남쪽 범죄자들의 두목", 로페 이븐 무하마드를 "북쪽의 무법자"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라고사 포위전에서 전사하자 로페는 에브로 계곡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시작한 포위전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사라고사 사람의 뜻밖의 창에 맞아 사망했고, 머리가 잘려 코르도바로 보내져 에미르 압둘라에게 바쳐졌습니다. 코르도바에서는 이 두려운 적의 머리를 8일간 전시한 뒤, 에미르 권력의 용감한 적에게 걸맞은 예우로 매장했습니다.

젊은 로페는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의 적들에 둘러싸인 채 바누 카시 가문과 영지의 수장 자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남쪽의 투추비, 서쪽의 알폰소 3세, 북쪽의 팜플로나 세력에 압박받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비극적 최후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10세기 초 그는 타라소나에서 알폰소 3세 군을 격파하고 톨레도 통치권을 되찾아, 비시고트 왕국의 옛 수도이자 타호 강변의 요충지 톨레도를 4대에 걸쳐(무사 이븐 무사부터) 바누 카시 가문의 수중으로 되돌렸습니다. 하지만 톨레도 지배는 짧았고, 로페는 알폰소 3세의 라리오하와 알라바 영지 공세에 다시 시달려야 했습니다.

로페 이븐 무하마드의 죽음과 바누 카시 가문의 느린 종말 (907-924)

이 무렵 산초 1세 가르세스가 팜플로나 왕위에 올라 바누 카시의 마지막 대지도자에게 또 다른 적이 되었습니다. 907년 여름, 로페 이븐 무하마드는 팜플로나 수도 팜플로나 인근에 진을 치고 공격했으나, 산초 가르세스 1세 군이 쳐놓은 매복에 걸려들어 과거 자신이 애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함정에 빠져 전사했습니다. 이후 바누 카시 가문의 몰락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죽음으로 혼란과 약세가 드러나자 적들이 주요 거점들을 차지했습니다. 압둘라(로페의 동생)가 가문을 이끌며 라리오하, 나바라 리베라, 타라소나 일대 영지를 유지하고 에미르에게 복종하며 가끔 산초 1세 가르세스와 충돌했습니다. 915년 한 전투에서 압둘라가 산초 1세 측에 포로로 잡혔다가 동생 무타리프가 몸값을 내고 석방시켰으나, 두 달 뒤 투델라에서 사망했습니다. 이슬람 역사가에 따르면 팜플로나 왕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중 독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바누 카시(Banu Qasi), 중부 에브로 강 유역의 영주들

이후 압둘라의 형제와 아들들 사이에 영지가 분할되며 바누 카시 영주권의 해체 과정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의 팽창주의 세력이 불분명한 국경 지대 양쪽에서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912년 압둘라만 3세가 코르도바 에미르가 되었고, 915년부터는 에미르국의 불안정한 북부 국경을 직접 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년 전인 914년에는 레온으로 도읍을 옮기고 팽창적 군사 정책을 편 오르도뇨 2세가 아스투리아스 왕위에 올랐습니다. 산초 1세 가르세스는 바누 카시의 거점들을 하나씩 빼앗으며 멸망이 예정된 왕조의 가장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923년까지 바스크인과 팜플로나인들은 여러 군사 원정을 통해 바누 카시 가문의 마지막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주요 거점들을 정복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이븐 알쿠티야는 바누 카시 영주권 소멸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산초 1세 가르세스의 이런 성공은 압둘라만 3세로 하여금 팜플로나에 대한 대대적 원정 준비를 서두르게 했습니다. 924년 4월, 에미르 자신이 지휘하는 대군이 코르도바를 떠나 북으로 진격했습니다. 이 원정으로 나바라 땅이 초토화되고 팜플로나가 파괴되었습니다. 귀로에 에미르는 투델라에 들러 마지막 바누 카시 일원들을 해산시키고 코르도바로 데려가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습니다. 투델라는 무하마드 1세 시절부터 코르도바 에미르들에게 충성을 다해온 아랍계 투추비 가문에게 넘겨졌습니다. 5년 뒤 칼리파를 자칭하게 될 압둘라만 3세는 이렇게 약 200년간 에브로 중류에서 존속하며, 남쪽의 코르도바 에미르들에게는 기독교 팽창의 완충국으로, 북쪽의 신생 팜플로나 왕국에게는 무슬림의 방벽 역할을 하며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치적 물라디 영주국으로 명맥을 이어온 왕조의 역사를 끝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나바라 왕국이라 불리게 된 것의 기원은 바누 카시 영주국의 존재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안달루스와 팜플로나 양쪽과 연관되면서도 양자 모두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압둘라만 3세는 안달루시아에서 우마르 이븐 하프순의 물라디 후손들을 아직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상태였고, 물라디 영주국들이 선대 에미르들에게 반란과 전쟁으로 권력을 갉아먹는 골칫거리만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로써 두 물 사이를 능숙하게 항해하던 한 왕조의 역사적 여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북쪽의 바스크 세뇨레스들(그들과는 여러 차례 혼인 동맹을 맺음)과 남쪽의 무슬림 에미르들 사이에서, 스스로 "스페인의 세 번째 왕"이라 칭한 무사 이븐 무사는 에브로 중류에 꽤 자치적인 혼혈 영주국의 기초를 닦았고, 그 후계자들은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와 군사적 리더십, 양측의 약점과 불안정한 국경을 이용해 수십 년을 더 버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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