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치는 왜 노르웨이에서 종이클립을 금지했을까?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과 점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 점령을 전략적·경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로 간주했습니다. 1940년 4월 9일, 독일 국방군(Wehrmacht)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해안 방어선 폭격과 기습 작전으로 단 48시간 만에 노르웨이 공군을 무력화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노르웨이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지만, 독일군의 압도적 우세 앞에서는 손쓸 수 없었습니다. 결국 같은 해 6월 10일, 트론헤임에서 노르웨이 군대가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내내 이동식 저항 정부를 이끌어 온 하콘 7세(King Haakon VII) 국왕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국 런던으로 피신해 망명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한편 노르웨이 본토의 행정권은 요제프 테르보벤(Josef Terboven)이 서장으로 있는 '라이히코미사리아트 노르베겐(Reichskommissariat Norwegen)'이 장악했으며, 이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괴뢰 정부였습니다.

나치는 왜 노르웨이에서 종이클립을 금지했을까?

오슬로에 진입하는 독일군

'온건한' 통치와 유대인 박해

노르웨이인들이 아리아 인종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던 탓인지, 독일 점령 당국은 이곳에서 다른 점령지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습니다. 성직자, 초등학교 교사, 대학 교수들에게 나치즘의 '혜택'을 직접 알리도록 교육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결과가 따랐습니다.

동시에 반유대주의 법률이 통과되어 약 700명의 노르웨이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자행된 대규모 학살에 가려져 덜 알려졌을 뿐, 수많은 만행이 은밀하게 벌어졌습니다.

종이클립, 저항의 상징이 되다

모든 점령지에서 그랬듯이 노르웨이에서도 저항 조직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조직은 오슬로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탄생했는데, 이들은 점령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종이클립을 선택했습니다.

왜 하필 종이클립이었을까요? 첫째, 너무나 사소한 물건이라 아무런 주의를 끌지 않았습니다. 둘째,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듯 노르웨이 민족의 단결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클립은 노르웨이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나치는 왜 노르웨이에서 종이클립을 금지했을까?

오슬로의 종이클립 모양 기념물

진짜 발명가는 누구였을까?

노르웨이 사람들은 종이클립의 발명자가 자국민 요한 발레르(Johan Vaaler)라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발레르는 1901년 미국과 독일에서 종이클립과 비슷한 물건의 특허를 등록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에는 관련 특허 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어 판매되지 못했고, 특허는 결국 만료되고 말았습니다.

오슬로 대학교 학생들이 사용한 클립은 1870년대부터 젬 제조(Gem Manufacturing)사가 생산해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이미 널리 유통되던 소위 '젬 클립(Gem clip)'이었습니다.

클립 사용은 사형에 처하다

처음 독일 점령 당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단순한 클립 하나가 대체 무슨 해를 끼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이 작은 물건이 나치 지배에 대한 노르웨이 민족의 저항 의지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결국 종이클립은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금지품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노르웨이 사람들은 옷깃에 클립을 꽂는 방식으로 조용히 저항을 이어갔고, 종이클립은 오늘날까지 노르웨이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